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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한민족사 학술지

'역사에 대한 인식은 미래를 반영하는 거울' 한일 고대사를 제대로 알고 이를 학생들과 이웃, 후세들에게 정확히 전달해 올바른 역사관을 형성하고 세계 속에 당당한 한민족으로 우뚝 설 수 있길 기대합니다.

 


<이시부타이, 다카마쓰 고분> 이시부타이, 다카마쓰 고분 - 윤명철
이름 :
윤명철
소개:
동국대 교양학부 교수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고구려 해양교섭사로 박사학위 취득. 현재 동국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사)고구려연구회 이사, 한국해양문화연구소장을 겸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역사는 진보하는가』『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장보고 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한민족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한국 해양사』『역사전쟁』『고구려의 정신과 정책』등 15권이 있으며, 역사 다큐멘터리 방송 출연 및 진행을 하고 있다.
E-mail :
ymc0407@yahoo.co.kr

 

불교문화를 꽃피운 아스카(飛鳥)

한반도의 각 지역에서 출발한 진출자들은 대한해협과 동해를 항해해 일본열도에 도착했다. 출발지와 항해조건, 그리고 정치적·군사적 능력에 따라 규슈 북부와 서부 지역, 동해와 연접한 이즈모(出雲)와 그 위의 쓰루가(敦賀)지역 등 여러 지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먼저 터전을 확보한 선점자 또는 토착민들과 갈등을 벌이거나 타협하면서 새로운 땅을 개척해 나갔다.

이들 여러 갈래 흐름은 역사의 흐름과 함께 각기 다른 길을 통해 오사카 근처 기나이(畿內)지방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산 능선과 강 줄기를 따라 계속 내륙으로 전진하다 낮은 구릉으로 둘러싸이고 들판이 펼쳐진 아늑하고 낯익은 곳을 발견하고 정착했다. 이렇게 아스카 시대는 시작됐다.

이 시대는 스이코(推古) 조를 전후한 시기로, 불교가 들어와 정착하고 친백제계의 소가우지(蘇我氏)가 집권하던 6세기 말부터 7세기 중엽이다. 아스카는 ‘비조(飛鳥)’ ‘명밀향(明日香)’, ‘아수가(阿須加)’ 등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안숙(安宿)’은 한반도에서 온 진출자들이 정착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스카는 야마토(大和) 평야의 한 가운데 위치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결코 넓지 않은 곳이다. 오사카가 있는 하내(河內) 지방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적당한 평야가 있고 군데군데 구릉지대가 있으며 주위는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도 적합한 곳이다. 이 구릉과 평야를 중심으로 소가우지를 비롯한 이른바 유력 우지(氏)들이 자기들의 근거지를 가지고 성장했다.

아스카란 지명은 여러 곳에 있다. 아스카란 말이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름을 사용한 집단이 이동하면서 붙여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대화비조(大和飛鳥)는 도아스카(遠飛鳥)이고 하내비조(河內飛鳥)는 지카아스카(近飛鳥)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 지명을 사용하는 집단이 정착한 순서를 나타낸다. 5세기 후반 웅략왕(雄略王)때 아스카에 가까운 초뢰조궁(初瀨朝宮)에 궁을 지은 것을 계기로 하여 아스카는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아스카 시대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불교의 공인과 발전이고, 둘째는 정치질서의 확립과 율령정치(律令政治)의 시작, 셋째는 문화의 발달과 국제성이다. 이 시기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새로운 문화의 조직적이고 대량적인 수입으로, 과도기에 변화를 촉진시키고 방향을 결정짓는 요소가 됐다.

일본열도가 수입한 문화는 주로 한반도에서 대량으로 건너간 집단에 의해 전수되고 완성됐다. 정치·기술 등 사회문화와 불교·미술 등 종교문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도래집단들은 기술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는데, 베민(部民)이 되어 정착하기도 했다. 진출자들의 분야는 시베(史部), 가이고가이베(蠶飼部), 고후쿠베(吳服部), 도베(陶部), 가지베(鍛治部), 긴쇼쿠베(錦織部), 소쿠베(?部), 구라베(藏部) 등 여러 기술 분야가 있었다. 제방(堤防), 수리(水利), 주조(酒造), 조선(造船) 기술도 이들에 의해 전수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또 한자를 사용해 복잡하고 체계화된 왜 조정의 기록과 사무를 보았으며, 재정상의 관리나 역사기술을 담당하기도 했다. 결국 한반도에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건너온 각종 기술과 학문 및 한자가 야마토 조정을 고대국가로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왜국의 사상뿐 아니라 정치체제의 변화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불교의 전래였다.

일본 열도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552년 임신(壬申)에 들어왔다는 설이다. 또 다른 하나는 538년 무오(戊午)설이다. 538년은 백제의 성왕이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 해다. 「上宮成德, 法王帝說」「元興寺 伽藍綠起幷流記資財帳」 등에 무오년으로 나오는데, 이때는 태자상(太子像), 관불기(灌佛器), 설불기(說佛起) 등을 보냈다고 한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긴메이(欽明) 13년인 552년에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성왕)이 서부희씨(西部姬氏),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 등을 통해 금동석가불상 1구를 비롯하여 번개(幡蓋) 약간과, 몇 권의 경전 등을 보내왔다고 되어 있다. 또한 이 내용은 『扶桑略記(부상략기)』에도 나온다. 이 두 해의 공통점은 불승이 오지 않았고 불사도 건립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일부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 부처와 보살의 상이 있는 불사수경(佛四獸鏡)이 출토됐다. 이는 이미 5세기경부터 일본에 불교가 전파됐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579년에 신라가 조를 바치고 불상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 불교가 다양한 경로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대국가의 기틀을 확립한 쇼토쿠 태자는 섭정이 되면서 불교 흥륭의 조를 내리고(594년), 17조 헌법 가운데 불교 중흥책을 삽입했다. 그 후 일본문화사에는 아스카를 중심으로 한 불교문화가 꽃을 피우는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승려, 그리고 사찰건립과 불상조성에 참여할 기술자들이 백제로부터 대거 일본 열도로 들어왔다. 당시 한반도로부터 들어온 기술자들의 규모가 대단했다는 것은 『일본서기』 긴메이(欽明)조나 스()조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때는 불교 관계 기술자들만이 아니라 역박사(歷博士), 의박사(醫博士), 악인(樂人) 등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일본 최고의 사찰 飛鳥寺

아스카(飛鳥)에는 사찰과 궁전, 호족들의 저택이 들어섰고, 많은 당탑(唐塔)들이 세워졌다. 소가노우마코는 먼저 아스카에 일본 최고의 사찰로 꼽히는 아스카데라(飛鳥寺)를 창건했다. 스 때인 588년에 착공해 8년 만인 596년 스이코 천황 때에 끝난 대공사였다. 창건을 시작하던 해에 백제에서 사신과 승려, 불사들을 보내고 창건에 필요한 건축가와 도공, 기와공, 화공 등이 건너왔다. 그리고 고구려는 황금 320냥쭝을 보내왔다. 이 절에는 백제에서 온 안작조(鞍作鳥)가 만든 금동석가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불교를 매개로 한 백제의 진출은 6세기 후반에 이르면 더욱 본격화되어 야마토 조정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을 한다. 『일본서기』 비타쓰(敏達) 천왕 6년인 577년 조를 보면, 백제에 갔던 사신들이 백제왕이 보낸 경론 몇 권, 율사(律師), 선사(禪師), 비구니, 주금사(呪禁師), 조불공(造佛工), 조사공(造寺工) 6명과 함께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불상을 보내왔다고 한다. 스이코(推古) 5년인 598년에는 아좌태자(阿佐太子)를 보냈다. 이는 당시 백제가 불교전파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603년에는 쇼토쿠 태자가 백제로부터 받은 존불의 상을 하타노 가와가쓰(秦河勝)가 받아 봉강사(峰岡寺)를 건립했다. 이때 받아서 모신 불상이 미륵반가사유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신라로부터 616년과 623년 두 차례에 걸쳐 불상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쇼토쿠 태자는 나니와(難波)에 시텐노지(四天王寺)를, 야마토에 호류지(法隆寺)등 7개의 절을 세웠다. 사천왕사는 국가 진호(鎭護)의 기원을 위해서 건립한 것으로, 백제에서 온 기술자들에 의해서 건축됐다. 이외에도 씨족들이 씨사(氏寺)를 세우는 등 수많은 건축물이 세워졌다. 624년(스이코 천황 32년)에는 사원의 숫자가 46개나 되었으며, 그곳에 거주하는 승려의 숫자는 816명, 비구니는 569명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국가의 비호를 받으면서 아스카의 불교는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아스카 문화는 일본의 고대국가가 질적으로 성숙하고 비약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를 채워준 문화였다. 불교문화를 토대로 한반도의 정치역학과 관련한 기술자들의 대량 이주와 진출에 의해 형성된 문화였다. 한편, 중국 남북조와 수의 영향도 있었다. 이들 국가의 영향으로, 일본 열도는 비로소 국제문화의 무대로 편입된다.

 

이시부타이(石舞臺) 고분과 백제계 호족

아스카(飛鳥)는 낮은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들판 곳곳에 야트막한 구릉들이 산재해 있는데, 그 사이로 고분들이 흩어져 있고, 구릉으로 보이는데 정작 고분인 경우도 많다. 이미 발굴돼 유물조사가 끝난 곳도 있고, 아직 발굴이 안 됐거나 고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곳들도 많다.

이런 아스카의 고분들 가운데 가장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고, 피장자의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고분이 바로 이시부타이(石舞臺) 고분이다.

이시부타이 고분은 아스카천 상류, 구릉이 자락처럼 흘러내려오는 중간에 거대한 돌덩어리들로 형성되어 있다. 무덤의 봉분은 다 벗겨져 버리고, 내부의 현실(玄室) 또한 비바람에 노출된 채 장중히 자리잡고 있는 거대 고분이다.

그 독특한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시부타이는 고분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60여 년 전 나라현(奈良縣)과 교토 대학에서 학술 조사를 실시한 결과, 비로소 주구(周溝)를 둘러 쌓은 상원하방분(上圓下方墳)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75t이 넘는 거대한 화강암 30여 개로 석실이 구성되어 있는데, 현실은 횡혈식으로 길이가 7.7m, 폭은 3.6m, 높이는 4.7m가 넘는다.

이 고분에서는 부장품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피장자의 신분은 물론, 축조 연대조차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시 왕릉을 능가하는 대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버림받은 채 천 수백 년을 내려왔다는 사실이 아스카 시대의 정치상황을 짐작케 할 뿐이다.

이시부타이 고분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일본고대사의 독특한 사회구조를 알 필요가 있다. 일본사회는 고대로 이행하면서 원시사회의 혈연공동체적 사회의식이 붕괴되고 활동 공간도 크게 확대된다. 일정 지역에서 같은 조상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제사를 중심으로 동족단을 구성했다. 이 동족단(同族團)을 우지(氏)라 부른다.

우지들은 모두 가바네(姓)를 가지고 있으며 신분을 나타내는 칭호도 갖고 있다. 우지의 명칭은 거주지명을 따라 이시카와우지(石川氏), 가쓰라기우지(葛城氏)라든가, 혹은 조상의 이름을 따라 구메우지(久米氏), 세습하는 직업명을 따라 나카도미우지(中臣氏), 인베우지(忌部氏), 모노노베우지(物部氏) 등으로 불렸다.

야마토 조정은 이처럼 크고 작은 우지가 모여 형성된 것이며, 그 중 대표적인 우지가 이른바 천손족(天孫族)이다. 이 우지의 가장인 우지가미(氏上)는 모든 우지의 가장으로서 정치적 수장의 자격을 갖는다. 이를 오키미(大王)라고 하는데 이것이 발전해 천황이 된 것이다.

7세기경 이런 우지들 가운데서 천황을 누를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우지가 바로 소가우지이다. 소가우지의 가계는 소아석천숙(蘇我石川宿)에서 시작해 만지(滿智), 한자(韓子), 고려(高麗) 그리고 중흥조인 도목(稻目)을 거쳐 마자(馬子), 하이(蝦夷), 입록(入鹿)으로 연결되면서 끝난다. 그런데 만지란 인물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조에 등장하는 목협만치(木?滿致)로 추정된다. 목협만치는 개로왕 21년 (475) 9월,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왕도가 위협당하자 왕자인 문주와 함께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던 인물이다. 이후 그의 흔적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야마토(大和)에 근거를 둔 신흥세력인 소가우지는 불교의 수입을 매개로 백제와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고대국가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불교는 질서 개편을 요구하던 정치권에 변화의 강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불교 교리는 물론, 불교가 가진 정치·문화적인 배경이 상승적으로 작용해 야마토 조정에는 종교투쟁 형식의 정치권력 투쟁이 전개됐다. 정치투쟁은 내부적으로는 대왕가와 호족들의 싸움, 불교의 도래와 함께 새롭게 등장한 신흥 호족과 구(舊)귀족의 갈등 등 복합적인 양상으로 전개됐다. 대외적으로는 불교를 전수해 준 백제세력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대왕 및 신흥 호족을 한편으로 하고, 상대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구호족들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양대 세력 간의 갈등으로 전개됐다.

이때 불교의 수용을 놓고 친(親)황실계이며 신흥세력으로서 오오미(代臣)인 소가우지(蘇我氏)는 강력한 무장집안으로서 오무라지(大連)인 모노노베 우지(物部氏)와 신도(神道)의 제식을 맡은 집안인 나카토미우지(中臣氏)의 보수연합과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백제의 후원과 시대적 요구에 힘입어 소가우지는 30년 만인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시대에 이르러서 강력한 정적인 모노노베우지를 타도하고 587년에 불교를 공인받는다.

이처럼 복잡한 정치적 갈등을 거쳐 공인된 불교의 수용은 소가우지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했고, 한편으로는 친(親)백제계를 기반으로 한 황실세력의 강화를 의미했다. 그러나 강력한 권력을 획득한 소가우지는 곧 왕권을 확립하려는 왕실과 갈등을 일으켰고, 그 갈등은 복잡한 정치 역학 속에서 소가우지의 몰락을 가져왔다.

 

다카마쓰고분(高松塚)과 고구려 문화

645년 다이카(大化) 개신이 일어나면서 아스카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고대국가 형성에 영향을 끼쳤고 왕릉보다 더 큰 거대한 고분을 축조할 능력을 가졌으나, 결국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소가우지의 운명을 이시부타이(石舞臺) 고분은 증언하고 있다.

일본 열도에는 흔히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고구려의 흔적이 많다. 다카마쓰 고분(高松塚)은 일본 열도 내에 가장 확실한 흔적으로 남아있는 고구려계 유적이다. 다카마쓰 고분은 한때 일본 전후 최대의 발굴로 평가됐다. 죽순을 캐던 농부가 발견했는데, 정식 발굴은 1972년 이곳에서 두 정거장 떨어져 있는 가시하라(槿原)고고학 연구소에 의해 이루어졌다.

직경 18m, 높이 5m의 원분으로, 규모는 다른 고분에 비해 그리 크지 않다. 맞은편 언덕에 있는 문무왕릉보다도 작고, 바로 위에도 다른 고분 몇 기가 겹쳐 있어 피장자(被葬者)가 그리 중요한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 고분이 그렇게 주목받은 것일까? 당시 일본 학자들은 물론이고 남한과 북한 학자들까지 모여 발굴결과를 놓고 격렬한 토론을 벌였었다.

현장에 가면 진짜 고분은 폐쇄해 놓고, 무덤 내부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전시관이 있다. 석실 내부는 길이 265cm, 높이 113cm, 폭 103cm의 조그만 현실(玄室)이다. 부장품들은 거의 도굴되어 발견된 유물은 별로 많지 않다. 다만 고분의 천장과 벽에 그려진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일본에선 벽화가 있는 고분을 보통 장식고분이라고 하는데, 규슈 북부에 몇 개가 있을 뿐이고, 그것 역시 주술적 성격을 띤 간단한 형태의 것이다. 이를테면 삼각형 같은 기하학 무늬나 동심원, 배, 사람 등이 유치한 형태로, 그것도 붉은색과 흰색의 단조로운 색채로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다카마쓰 고분은 장식고분의 수준 정도를 훨씬 뛰어넘어 사면에 회칠을 하고 그 바탕 위에 정식으로 그린 완전한 채색벽화이다. 이 고분이 처음 발견됐을 때 전 일본 열도가 흥분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벽화가 표현하고 있는 사상이나 등장인물이 고구려 계통이었기에 각별한 관심이 쏟아졌다.

다카마쓰 고분에는 천장에 흰 점으로 표시된 북두칠성 등 성수도가 그려져 있고, 사방 벽에는 사신도(四神圖)가 춤을 춘다. 북쪽에는 현무가, 서쪽에는 흰 몸뚱이를 가진 백호가 긴 몸을 휘감고 있다. 머리 위에는 달이 있는데, 희미해서 보이지 않지만 가운데에는 두꺼비나 개구리가 있는 것 같다. 달 안에 동물을 그리는 것은 고구려 벽화에서 흔히 보이는 양식이다. 동쪽 벽에는 용이 있는데, 이 역시 금박의 태양을 이고 있고 그 안에는 발이 셋 달린 삼족오(三足烏)가 검게 그려져 있다. 새는 태양의 전령이면서 태양 자체를 상징한다. 천왕지신총을 비롯한 고구려 벽화에는 신 혹은 인간이 새를 타고 날아다니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검은 새인 까마귀나 까치는 태양을 상징한다. 새의 다리가 셋인 것은 우리 민족의 3 사상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三足烏는 우리 민족의 3사상 표현

다카마쓰 고분의 이런 그림들은 모두 만주 통구 집안 지역의 벽화인 오회문 4호묘 5호묘, 그리고 장천 1호분 삼실총 등에서도 발견된다. 만주벌판에서 날아다니던 태양의 새 삼족오, 해모수가 타고 내려온 용이 아스카의 한복판에서 승천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뛰어난 예술품 가운데 하나다. 대담하고 힘차면서도 자유로운 붓질로 화강암이나 회벽에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고 있다.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를 가진 고구려인들은 하늘의 자손이므로 우주 전체를 무대로 생활해야 했다. 또한 인간은 우주의 삼라만상과 공존해야 하므로 벽화에는 다양한 주제와 소재, 그리고 상반된 정신세계가 동시에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니 회화적 통일성을 유지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예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매우 주목할 만 하다. 1500년 전의 채색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안료와 민어풀, 해초 등 접착제의 발명과 사용은 현대회화에서도 수수께끼이며, 습도나 온도, 명암 등 내부환경을 조정하는 과학적인 능력 역시 풀어야 할 숙제이다. 건축학적으로도 벽면에서 천장까지 계단식으로 올라가며 쌓은 말각조정 양식 등은 오로지 고구려만의 독특한 능력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벽화 속에 표현된 고구려인들의 우주관과 세계관, 역사관이다. 천(天) 지(地) 인(人)을 구분하되 하나의 세계 속에 통일시키고, 그 통일자의 역할을 인간에게 부여하고 있다. 반수반인(半獸半人), 신인(神人)의 존재, 신과 인간의 극적인 만남 등은 모든 대립을 하나로 무화(無化)시킨다. 다카마쓰 고분처럼 두 마리의 용이 몸뚱이를 꼬아 한 몸이 되어가는 극적인 자태는 고구려인들의 변증법적인 사고를 보여준다. 갈등과 대립을 무화하고, 조화와 합일을 지향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일본인들은 다카마쓰 고분의 벽화를 초당(初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가야, 백제의 영향도 그렇지만 고구려의 영향까지 인정하기는 싫었을 것이다. 그러니 시대적으로 고구려보다 더 늦은 당의 영향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긴 발굴 당시에 일본에 건너간 한국학자들 가운데 일인들의 주장에 동조한 사람들도 있었다.

다카마쓰 고분이 고구려계이며 피장자가 고구려 사람인 것은 벽화에 나타난 인물들을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여인들과 남자들이 있는데 이들의 복장은 당시 고구려의 것이다. 남자들은 고구려인들처럼 머리에 모자를 썼고, 바지 위에 긴 두루마기를 입었다. 특히 4명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뒤에서 묶었고 상의는 소매가 길고, 허리띠를 매었다. 그리고 치마를 땅에 끌릴 정도로 입었는데, 그 문양이 세로로 난 색동주름치마이다. 덕흥리 수산리고분, 그리고 평양 부근의 쌍영총 벽화고분의 여인과 자매지간인 듯 쏙 빼닮았다. 둥그스름한 얼굴이며, 두껍지만 강한 턱, 기품 있는 눈길마저 똑같다. 집안지역의 장천 1호분에는 100여 명에 달하는 고구려 남녀가 나와 춤을 추고 사냥하고 씨름을 하는데, 이들의 삶을 우리는 다카마쓰 고분의 벽화에서 다시 보고 있는 것이다.

다카마쓰 고분 벽화를 그린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고구려인들을 묻었고 고구려벽화를 그렸다면, 화공 역시 고구려인들임이 틀림없다. 불사와 고분 축조가 한 사람 아닌 여러 사람들에 의한 공동작업의 산물이듯 벽화고분의 제작 역시 한 명의 화공으로는 제작이 불가능하다. 이 무렵 고구려에 온 사람들 가운데는 610년 다른 승려들과 함께 온 담징이 있었다. 호류지(法隆寺)의 금당벽화로 알려져 있는 담징은 고구려가 야마토 조정에 보낸 화공집단 가운데 한 명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이 다카마쓰 고분 외에도 다른 고분들을 축조했고, 그곳에는 반드시 고구려 벽화가 살아 숨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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