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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한민족사 학술지

'역사에 대한 인식은 미래를 반영하는 거울' 한일 고대사를 제대로 알고 이를 학생들과 이웃, 후세들에게 정확히 전달해 올바른 역사관을 형성하고 세계 속에 당당한 한민족으로 우뚝 설 수 있길 기대합니다.

 


<후나야마 고분> 후나야마 고분 - 서희건
이름 :
서희건
소개: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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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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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관·금동신발도 나와

후쿠오카(福岡)에서 구마모토(熊本)로 가는 길 다마나(玉名)시에 있는 후나야마(船山) 고분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강전천(江田川)이 본류인 국지천(菊池川)에 합류하는 부근의 남쪽 광대한 대지 위에 여러 개의 고분과 함께 있었다.

이 고분에서는 귀중한 유물이 많이 나왔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인 1873년 1월 4일 토지 주인의 꿈에 후나야마 꼭대기를 파 보라는 계시를 받고 발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발굴 즉시 유물에 대한 보고가 나오지 않은 점이다. 메이지(明治) 후반에야 연구보고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예는 최인호(崔仁浩)의 역사소설 ‘잃어버린 왕국(王國)’에 나오는 석상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 발굴에서도 있었다.

후나야마 고분에서는 은상감(銀象嵌)의 말 그림이 있는 철제칼이 발굴됐다. 그리고는 야마다이(邪馬台國)의 여왕 후미코(卑彌呼)의 묘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군국(軍國) 일본이 온 신경을 써서 조사에 재답사를 할 만큼 귀중한 유적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 고분의 크기는 전장 46m, 후원(後圓)부 직경 26m, 높이 7.9m, 전방(前方) 폭 23m, 높이 6m로 지금 볼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규모가 컸었다.

고분에서는 집모양의 석관이 나왔다. 유명한 화산인 아소(阿蘇)용암재를 쪼개 만든 조합식 관뚜껑이 있고, 석관 안은 단청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석관 내부의 길이는 2.2m, 폭 1.1m, 천장 높이가 1.45m이다. 관뚜껑은 좌우로 열 수 있게 되어 있다.

뒤늦게 밝혀진 이 고분 출토유물은 모두 92건이었다. 대표적인 것은 청동거울(6개) 구슬(7개) 관옥(管玉 14개) 유리옥(90여개) 갑옷(短甲 등 3벌) 칼(7개) 창신(4개) 철촉금동제관모(1개) 금동제관(3개분) 금동제 신발 말재갈(2조) 금귀고리(2쌍) 금팔찌(1쌍) 도자기잔(1조) 등이었다.

금동제관모와 금동제관 등 놀라운 유물과 함께 청동거울과 철제칼에는 글자까지 새겨져 있었다.

대단한 발굴·발견임이 분명하지만 일제(日帝)는 이런 사실을 즉각 공표하지 않고 학자들의 연구를 거쳐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청동거울은 우리나라 공주(公州) 무령(武寧)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것들이다. 이 거울이 후쿠오카(福岡) 등 개척자들이 상륙한 지점을 따라 분포되어 있는 것도 관심거리이다. 그런가 하면 아름답기 그지없는 금귀고리는 우리나라 삼국 초기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것들과 꼭 같다.

일본학자들은 이 고분 출토유물 가운데 자랑할 만한 것으로 이들 금귀고리를 들고 있다. 그 세공기술이 더할 수 없이 정교하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색유리의 구슬을 상감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금동신발은 전면에 거북껍데기무늬를 연속으로 눌러 찍고 그 사이에는 금줄로 보요와 유리구슬을 달았다. 밑바닥에는 운동선수의 스파이크처럼 4개의 침이 있어 걸음을 걸을 때 미끄러지지 않도록 한 것 같다. 그러나 이 금동신발은 실용품이 아닌 의례용으로 보인다.

 

대도(大刀)에 새겨진 은상감 글자

금동관은 모두 3개가 나왔다. 하나는 관모로 용과 화염상 무늬가 투조(透彫)되어 있고 뒷면에는 사행상반구형(蛇行狀半球形)의 장식 금구(金具)가 붙어 있다. 다른 두 개는 천관(天冠)으로 하나에는 보요가 여러 개 달려 있고 머리띠 무늬에 마름모 모양의 무늬를 연속해서 눌러 찍었다. 이들 금신발이나 금관은 우리나라 공주 무령왕릉이나 익산(益山)고분에서 나온 유물과 크기만 다를 뿐 모양은 꼭 같다.

이 고분에서는 14개의 큰 칼이 나왔다. 이 가운데 은상감으로 글자를 새겨 넣은 칼이 발견됐다. 은상감 대도는 손잡이가 없으나 길이는 85cm나 된다. 12개의 국화무늬와 말이 상감되어 있고 칼을 만든 사람(刀工)의 이름, 글을 쓴 이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는 명품인 것이다.

그 내용은 ‘서치대왕(瑞齒大王)때 아구(牙口)라는 사람이 8월 중순께 큰솥 4자 정도의 대도(大刀)를 수십 번 두들겨서 좋은 칼을 만들게 했다. 이 칼을 차는 자는 자손대대로 그 은혜를 입을 것이다. 칼을 만든 도공은 이태가(伊太加), 글자를 쓴 이는 장안(張安)이다.’

이 글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금석문(金石文)이라고 하여 교과서에까지 소개되어 있다. 이 칼이 제작된 연대는 5세기 전반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다른 명문은 잘 보이나 결정적인 부분은 X선으로도 판독이 어렵다는 점이다.

일부러 글자를 마모시켰다고 의심을 받는 석산신궁(石山神宮)의 칠지도(七支刀)와도 같은 현상이 이 고분에서 출토된 은상감 칼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고구려·백제·가야의 유물 시비

흥미 있는 것은 이 고분의 출토유물을 놓고 한일 학자들의 견해가 다른 것이다. 동국대 일본학연구소장 김사엽(金思燁) 교수는 이들 유물을 고구려 제품으로 보고 있다.

김 교수는 당시 열도의 기술로는 이만한 상감기술이 없었다고 지적하고, 당시 국지천(菊池川) 주변은 고구려의 식민지로 기술자들을 보내 부족한 물자를 조달하고 있었는데 그 지휘자인 고관이 죽자 무덤을 만들어 장사지낸 것이 아니냐고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무덤의 주인도 고구려인이요, 칼을 만든 사람들도 고구려인이라는 추정인 것이다.

한편 북한의 사학자 김석형(金錫亨)은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이 신하로 데리고 있던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일본학자 직목효차랑(直木孝次郞)은 “이 고분이 한국 도래라고 하는 화려한 부장품을 다량 출토시켰다”고 지적하고 “금색 찬란한 장신구는 한국 공주의 무령왕릉에서도 출토되었으나 오히려 신라고분에서 더 많이 나왔다”고 상기시켰다.

따라서 이 고분의 호족은 야마토(大和)정권에 따르면서 동시에 한국 남부 특히 신라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던 인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 일본학자는 또 명문에 나오는 이태가(伊太加)는 일본인, 장안(張安)은 한국인의 이름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면 서울대 최몽룡(崔夢龍) 교수(고고학)는 출토유물 중 뚜껑 있는 합(有蓋盒)은 전남 담양 제월리 백제고분의 출토품과 매우 가깝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학자 을익중륭(乙益重隆)은 이들 토기도 마구와 함께 가야의 것으로 보고 있어 보는 이들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르다. 어떻든 고구려, 백제는 부여계를 바탕으로 하는 형제국가이고, 가야는 백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개척자들이 가져간 유물일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비전문가들의 눈으로도 후나야마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고대 우리나라에서 건너갔거나, 열도로 이주한 개척자들이 만든 것임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것과 닮았음을 실감할 것이다.

이들 유물은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실물은 도쿄박물관에 있다. 이곳에 있는 것은 꼭 같은 모양으로 만든 모조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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