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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한민족사 학술지

'역사에 대한 인식은 미래를 반영하는 거울' 한일 고대사를 제대로 알고 이를 학생들과 이웃, 후세들에게 정확히 전달해 올바른 역사관을 형성하고 세계 속에 당당한 한민족으로 우뚝 설 수 있길 기대합니다.

 


<오늘의 일본, 그 빛과 그림자> 오늘의 일본, 그 빛과 그림자 - 조양욱
이름 :
조양욱
소개:
일본문화연구소 소장
한국외국어대 일어과 및 대학원 수료.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와 국민일보 도쿄 특파원, 문화부장을 거쳐 현재 일본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천의 얼굴 일본 일본』 『일본, 키워드99─이것이 일본이다』 『열 명의 일본인, 한국에 빠지다』 『일본을 묻는다』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E-mail :
y2cho88@yahoo.co.k

 

족보까지 꿰뚫는 경제전문가

벌써 강산이 두 번은 바뀐 20년 전의 일화 한 토막부터 소개해 보자. 당시 언론사의 햇병아리 기자 신세를 간신히 넘어섰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괴상한 일본인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평소부터 교분이 있던 일본 신문의 서울특파원 K씨가 소개해준 그 사람을 만난 곳은 무교동의 어느 음식점에서였다. 처음 대면한 우리는 명함을 주고받으며 수인사를 나누었다. 물론 일본어로였다. “하지메마시테(처음 뵙습니다)…” 어쩌고 하는, 바로 그 초보 일본어 회화 교재에 나오는 방식대로 말이다. 그런데 내 명함을 힐끗 들여다본 그의 입에서 느닷없이 유창한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창녕 조 씨로군요”순간 나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니, 이럴 수가…! 그가 한국어를 잘 해서가 아니었다. 그 정도 한국어를 구사하는 일본인은 적잖았다. 나의 놀라움은 그가 ‘조(曺)’라는 내 성의 본관을 정확하게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희성(稀姓)에 속하여 일가붙이가 아니면 한국인들도 잘 모르는 걸 30대 후반밖에 안된 일본인이 알다니!

나는 다시금 그가 준 명함을 살펴보았다. 그의 성씨는 ‘복부(服部)’였다. 직업은 경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적혀 있었다. 방금 인사를 나눌 때 그가 무어라고 자신의 성을 들먹였지만, 쇠뭉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진 내 머리에서는 그게 생각나지 않았다. 명함을 뒤집어 영문을 보고서야 겨우 그걸 ‘핫도리’라고 읽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상에, 경제를 공부한다는 장년의 일본인이 마치 길거리 관상쟁이 늙은이처럼 남의 족보를 또르르 외고 있는 마당에, 대학 시절부터 일본을 공부했답시고 으스대던 나는 제대로 일본인의 성씨 하나 못 읽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마저 굳어진 나는 범인을 조사하는 형사로 돌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 대관절 뭐 하는 사람이냐? 어떻게 남의 본관까지 아느냐고 따지듯 물었던 것이다. 그는 빙그레 웃음을 머금은 채 이실직고, 낱낱이 자백(?)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또다시 머리카락이 쭈뼛 솟구쳤다.

그는 아시아경제연구소, 속칭 ‘아지켄’이라 불리는 일본정부 산하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다.

당시 그는 2년 동안 서울대학교에 연수 형식으로 파견되었는데,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한국의 재벌기업 연구’였다. 막상 서울에 와서 삼성이니 현대니 하는 재벌들을 연구하려니까 초입머리에서 막혀 버렸다고 한다. 일가친척, 사돈의 팔촌까지 얽힌 족벌경영이 워낙 복잡하여 그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족보 공부부터 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하다 보니 ‘재미가 있어서’ 관상쟁이 발밑 언저리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먼저 두 가지 사실을 알아 차릴 수 있다. 첫째, 그 무렵 이미 일본에서는 족벌경영을 하는 대기업은 없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특이한 직종에서 자자손손 대를 물려가며 가업을 이어주는 ‘일본적인 풍토’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둘째로, 일본인의 친척 관계는 우리와 달리 간단명료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시아버지와 장인의 호칭에 차이가 없고, 고모나 이모가 똑같은 말로 불린다는 사실이 그네들의 단순한 친족 개념을 증명해 준다. 그러니 일본에서는 4촌을 넘어서면 이미 남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내 머리카락이 솟구친 요인은 딴 데 있었다. 핫도리 씨가 소속된 ‘아지켄’에는 한국경제만을 전담하는 연구원이 10명이 넘었다. 분야도 저마다 달라‘기업’,‘금융’,‘농촌경제’를 비롯하여‘북한경제’에 이르기까지 세분되어 있었다. 나중에 별도의 취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아지켄’에 상당하는 한국의‘국제경제연구원’에는 일본경제를 연구하는 사람이 고작 3명뿐이었다. 그나마 두 사람은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생이었으니, 이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일본이 한국을 연구하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 엄청난 괴리를 무엇으로 변명한단 말인가.

일반적으로 일본의 서민들은 한국에 대해 무지하기 짝이 없다. 심지어는 한반도가 왜 분단되었는지, 한일 간의 영토분쟁의 불씨인 독도(일본명 竹島)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숱하다. 반면 그 나라에는 외곬으로 한 가지 일에만 평생 매달리는 진짜 프로페셔널이 널려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한국의 민족시인 윤동주(尹東柱)를 연구하는 일본인에 의해 귀한 유고가 햇빛을 본 지 오래고,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라는 할머니 작가가 쓴 역사 르포 『민비 암살』(조선일보사刊)은 명성황후의 최후를 가장 리얼하게 파헤쳤다는 평을 받았다. 지금껏 풀리지 않는 응어리로 남아 있는 일제하 종군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한 것도 이 방면의 일본인 연구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무진장 쓰고, 무진장 읽는 일본인

몇 해 전, 일본 국립 도쿄외국어대학 사에구사 도시카쓰(三枝壽勝) 교수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사에구사 교수는 한국문학을 전공하는 학자로, 한국에서 펴낸 『사에구사 교수의 한국문학 연구』(베틀북 刊)라는 뛰어난 연구서는 문화관광부 선정 ‘2000년도 우수 학술도서’에 포함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소개할 이야기는 그의 전공과는 무관한 하나의 우스개다.

어느 날 그의 학교에 도둑이 들었다. 대학 캠퍼스에 유별난 재물이 있을 리 만무하니 도둑치고는 꽤 어수룩한 좀도둑이었던 모양이다. 이 도둑이 무어 값나가는 물건이 없을까 하고 학과 사무실을 뒤지다가 마침 자료를 복사하느라 들른 사에구사 교수에게 들통났다.

좀도둑, 아니 정확하게는 절도 미수범을 넘겨받은 경찰이 여죄를 추궁했다. 범인으로서야 딱 잡아떼고 입 다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그의 가방에서 빼도 박도 못할 증거품이 발견되고 말았다. 고지식하고 아둔한 이 친구가 절도 행각 10년의 실적을 빠짐 없이 자신의 노트에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이런 이야기 끝에 그가 또 하나의 괴짜 도둑에 대해 일러주었다. 이번에는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 시절의 일이었다.

기록상으로는 ‘쓰리’라고 되어 있었다. 우리말로는 소매치기였던 셈인데, 이 자는 훔친 물건을 공동묘지 여기저기 비석 뒤에 숨겨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곤 했다. 그는 장물을 감추어둔 묘비 모양을 하나하나 그림으로 그려 간직했다. 그래야 나중에 찾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린 그림이 후대에 전해져 비석 연구의 귀한 자료가 되리라는 사실은 당사자도 까맣게 몰랐다.

일종의 ‘도둑일지’를 꼬박꼬박 적은 오늘의 도둑과, 글 대신 그림으로 ‘장물 화첩(畵帖)’을 남긴 옛날의 도둑. 하찮은 우스개에 불과한 이 이야기에서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 온다. 그 정체를 밝히기에 앞서 비슷한 맥락의 예화(例話)를 좀더 들추기로 하자.

 

연필로 쓴 메모의 의미

2000년 여름 러시아 해군은 최악의 해난사고를 당했다. 최신예 핵 잠수함 쿠르스크호가 사고로 노르웨이 북쪽, 수심 100m의 바다에 가라앉아 118명이나 되는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인 중에는 90년 전 일본에서 일어난 잠수정 사고를 돌이키는 이들이 있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직후에 건조한 길이 23m, 폭 2m, 배수량 57t의 제6호 잠수정이 훈련 도중 자취를 감추었다. 1910년 4월의 일이었다. 가솔린과 2차 전지(電池)를 동력으로 삼았던 이 잠수정은 지금의 핵 잠수함에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수색에 나선 일본 해군은 이튿날 야마구치 현(山口縣) 앞바다 수심 16m 아래에 침몰된 잠수정을 발견했다.

인양된 잠수정의 내부 모습이 가관이었다. 14명의 승무원들은 모두가 자신의 근무 위치를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은 곳에서 죽어 있었다. 정장(艇長)이던 갓 서른의 해군 대위, 그의 군복 주머니에서는 침몰의 원인과 경과, 잠수정 내부의 상황을 띄엄띄엄, 그러나 차분하게 연필로 기록한 수첩이 나왔다(그에게 연필밖에 필기도구가 없었던 것인지, 그도 아니면 연필이라야 물에 젖어도 쉬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승무원 일동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의 직(職)을 잘 지켜 침착하게 일을 처리함… 12시 30분 호흡이 몹시 고통스러움…”

전등이 꺼지고 실내에 가스가 가득 찬 죽음의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기록은 “12시 40분이 됨”에서 멈춰졌다고 한다. 이 해군 대위의 글을 두고 일본의 문호(文豪)로 추앙받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는 ‘명문(名文)’이라 치켜세운 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문장이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성실의 극치라고 할 수밖에 없는 문장이라는 뜻이다.”(아사히신문 2000년 8월 18일치 ‘천성인어(天聲人語)’에서 재인용) 그것이 바다 밑에서의 사건이란다면, 하늘에서의 사건이 터진 것은 1985년 8월 중순이었다. 도쿄를 떠나 오사카로 향하던 일본항공(JAL) 점보 여객기가 추락했다. 승객과 승무원을 합쳐 무려 520명이 희생되었다.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추락현장을 정리하던 수색대원들은 종이 쪽지에 황급히 휘갈겨 쓴 여러 통의 유서를 발견했다. 그 위급한 상황에서도 아내나 자녀에게 당부의 말을 남기는 사람들.

도널드 킨이라는 인물은 미국인 최고의 일본연구가로 꼽힌다. 특출한 일본 연구서도 많이 집필했다. 그는 원래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 정보 분석요원이었다. 그가 한 일은 일본군 포로나 전사자의 소지품에서 수거한 일기장을 점검하여 알짜배기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전선에서건 후방에서건, 장교건 사병이건 가리지 않고 일기를 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미군이 “내일이면 우리 부대는 어디어디로 이동한다” 따위의 군사기밀을 일기장에서 찾아냈던 것이다.

이쯤이면 대충 알 만하다. 일본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무언가를 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잘 쓰는 사람은 읽기도 잘 한다. 그러니 인구 1억3000만이 채 되지 않는 일본이건만,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과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의 양대 일간지만 해도 하루 발행 부수가 각각 1000만 부를 훌쩍 넘는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화제의 신간이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면 100만~200만 부는 예사로 팔린다. 요즈음이야 인터넷 세상이 되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문과 서적이 앞선 정보와 문물을 흡입하는 유일한 수단이었음을 고려할 때, 경제대국 일본을 일군 저력의 원천은 이제 대충 짐작이 간다.

일본의 현대화를 상징하는 키워드로 흔히 ‘화혼양재(和魂洋才)’를 내세운다. ‘일본의 정신’에다 ‘서양의 기술’을 합쳤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일본이 쇄국의 길을 버리고 외국을 향해 문호를 활짝 연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의 슬로건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일본은 어땠는가? 역시 남의 것을 받아들여 모방하고 개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대(事大)라는 욕을 먹을지 모르나, 논거의 신뢰성을 높이자면 아무래도 외국 석학을 끌어들이는 편이 낫겠다.

 

모방 끝에 이룬 기술대국

하버드대학 교수였으며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에드윈 라이샤워는 한마디로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 자가(自家) 약탕기에 넣고 달여 스승을 능가하는 문화의 꽃을 피웠다”고 단언했다. 그가 쓴 『라이샤워의 일본사』(일본 文藝春秋 刊)에는 이와 관련하여 “세계 최초로 조직적인 관비(官費) 해외 유학생을 파견한 나라가 일본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6세기 초엽 세 차례에 걸쳐 견수사(遣隋使)를 보낸 이래 200여 년 동안 꼬박꼬박 유학생을 보냈는데, 그중 일부는 몇 년씩이나 중국 땅에 눌러 살며 과학과 예술과 사상의 에센스를 흡입했다는 것이다.

또 있다. 이번에는 일본인 스스로의 언급이다. 소설가 겸 저술가로 명성이 자자하고, 내각책임제인 일본에서는 드물게 민간인 신분으로 경제기획청 장관에 발탁되기도 한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도 쿠바와 일본을 예시하며 명쾌한 논리를 편다. 한국에 번역된 그의 명저 『일본을 이끌어 온 12인물』(자유포럼 刊)의 서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일본과 쿠바 두 나라 다 비슷한 거리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대륙과 떨어져 있다. 다른 점이라면 쿠바의 건너편 아메리카 대륙에는 이렇다할 고대 문명이 없었던 반면, 일본의 건너편인 한반도와 중국에는 뛰어난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곶감을 빼어먹듯 알짜배기만 쏙쏙 뽑아 가면 되었다.”

그는 이를 두고 ‘효율성 높은 흉내내기’라고 높이 샀다. 남의 좋은 점을 본뜨되 내 것을 버리지 않으며, 둘을 조화시켜 보다 나은 무엇인가를 창조해 내었다는 의미이리라. 그 같은 탐욕적인 육지 문물 베끼기가 메이지유신을 이루면서 180도 방향을 틀어 서구로 눈길을 돌렸다. 저 옛날의 견수사처럼 이번에는 미국과 유럽으로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했던 것이다. 108명으로 짜인 사절단 가운데 60명의 유학생을 빼면 나머지는 거의가 새롭게 탄생한 메이지 정부의 핵심 멤버들이었다. 호기심에 불타 게걸스럽게 서양문명을 맛본 이들은 당초 10개월 일정을 1년이나 더 늦추며 신문물을 탐닉했다.

가령 필라델피아에서의 사절단 견학지를 살펴보자. 한 달 남짓 묵는 동안 해군 공창(工廠)과 탄광, 펄프공장에서부터 신문사, 조폐국, 보일러, 엔진, 제철, 농기구, 피혁, 카펫, 야채종자, 책방, 학교에 이르기까지 도시 전체를 이 잡듯이 뒤졌다. 게다가 밤이면 꾸벅꾸벅 졸면서 오페라 감상도 했다니 신흥국 일본을 부자나라로 키우겠다는 집념이 놀랍다.

이제 모방에 이은 일본인의 응용술을 살펴보자. 시대 순으로 색다른 대표작을 들추자니 쥘부채가 가장 앞자리에 놓인다. 지금껏 여름철이면 찾는 이들이 있는 쥘부채는 일본의 창안품이다. 일본인들은 한반도를 통해 건너간 둥근 방구부채를 발전시켜 접는 부채, 합죽선(合竹扇)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어령(李御寧) 교수는 그의 명저 『축소지향의 일본인』(기린원 刊)에서 이렇게 갈파했다.

“만리장성을 쌓은 중국인이나 피라미드를 만든 이집트인도, 그리고 파르테논을 세운 그리스인도 쥘부채의 그 바람은 몰랐던 것이다. 유럽의 경우 쥘부채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포르투갈의 상인들이 중국과의 교역을 개척한 15세기경의 일이었다. 그것도 유럽 각국에서 쥘부채가 인기 상품으로 등장하여 사교계에서 바람을 일으키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물론 그것은 모두 일본의 쥘부채였다.”

환골탈태의 두 번째 물품으로는 양산을 꼽기로 하자. 메이지유신 이후 채 10년이 되지 않는 사이에 일본인들은 비누를 사용하고, 시계를 찼으며, 쇠고기 전골을 즐겼고, 양산을 쓰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양산이 등장한 이유는 그것이 ‘영국신사의 심벌’로 멋있게 보였기 때문인데, 1873년의 ‘수입품 베스트 10’에 포함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그러던 것이 불과 몇 해가 지나지 않아 양산은 거꾸로 주요 수출품으로 둔갑했고, 나중에 가서는 꺾이고 접히는 간편 휴대품으로 개량되어 유럽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 같은 축소의 금자탑이 트랜지스터 라디오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태평양전쟁의 패전으로 일본은 초토화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깃발 아래 신음했던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참 ‘고소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네들은 불과 4반세기도 되기 전에 다시 일어섰다. 한반도에서 터진 동족상잔의 비극, 6·25로 인한 특수(特需)가 그들을 기사회생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영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위에서 적시한 ‘화혼양재’의 정신이 있었음을 부인하기도 어렵다. 덧붙여서 한 가지, 사상가이자 화가였으며 개혁의 리더이기도 했던 와타나베 가잔(度邊華山, 1793~1841)이 어느 장사치에게 적어 주었다는 다음과 같은 ‘상인(商人) 정신’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첫째, 종업원보다 일찍 일어날 것. 둘째, 열 냥짜리 손님보다 백 푼짜리 손님을 더 소중히 할 것. 셋째, 사간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바꾸러 온 손님은 사갈 때보다 더 정중히 대할 것. 넷째, 사업이 번창할수록 절약할 것. 다섯째, 한 푼이라도 지출이 있을 때에는 꼭 장부에 기입할 것. 여섯째, 항상 창업했을 때의 마음가짐을 지닐 것. 일곱째, 동일 업종의 가게가 근처에 문을 열어도 당당하게 선의의 경쟁을 할 것. 여덟째, 종업원이 독립하면 3년 동안 자금지원을 해줄 것.

 

패거리 정치판의 나라

자, 이제 끝으로 ‘경제는 1등인데 정치는 꼴찌’라고 푸념하는 정치판, 일본인들 스스로가 ‘물과 공기와 같은 존재’라는 일왕(日王), 최근 들어 빈번하게 고개를 내미는 ‘어물전 꼴뚜기’같은 우익의 궤변을 한 두름에 엮어서 훑어볼 차례다. 먼저 정계부터.

일본에서 사는 외국인들은 “이 나라는 선거로 날이 새고 선거로 날이 지는구나”하는 말을 곧잘 주고 받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참의원 양원제(兩院制)의 내각책임제여서 걸핏하면 ‘국회 해산’ ‘총선거’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그 바람에 500명이 넘는 중의원 의원과 그 절반인 참의원 의원이 4년 임기를 제대로 채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일찌감치 시작된 지방자치제 역시 선거 사태(沙汰)에 한몫 거든다. 47개 광역 자치단체를 필두로 600여 시(市), 2000을 헤아리는 정(町), 500여 개의 촌(村)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수장(首長)을 뽑아야 하며, 지방의회 의원 선출에다 잊을만하면 보궐선거마저 불거지니 유권자가 진저리를 칠 만도 한 것이다. 일본이 선거를 굳이 일요일에 하는 이유도 어쩌면 거기에 있는지 모를 일이다.

선거철이 되면 입후보자들 사이에서는 ‘3방’이라는 은어가 나돈다. 그것은 일본어 발음으로 ‘방’으로 끝나는 세 가지 득표의 키워드인데, 순서도 ‘간방(看板)’ ‘지방(地盤)’ ‘가방’ 이다. ‘간방’은 후보자의 간판, 즉 학력이나 경력을 뜻한다. ‘지방’은 선거구에서 누리는 일종의 텃세를 가늠하는 말이다. 마지막의 ‘가방’은 돈가방을 빗대었으니, 풍족한 선거자금의 유무를 가리킨다. 혈연, 지연, 학연의 ‘3연’이 판을 친다는 한국의 선거풍토와도 닮은 그런 분위기에서야 소속 정당의 정강정책이나 출마자 개인의 정치적 신념 따위가 먹혀들 소지가 적고, 혈혈단신의 정치 신인이 데뷔하기도 미꾸라지 용 되기만큼 어려운 노릇이다.

3방이 낳은 가장 일본적인 정치 현상으로 패거리 정치와 세습 의원이 꼽힌다. 저 옛날의 사무라이 사회를 연상시키듯, 힘을 지닌 한 명의 보스 아래 떼지어 파벌을 이루어 합종연횡하는 것이 일본의 패거리 정치다. 그에 비해 세습 의원은 아버지의 지역구를 아들이나 딸, 사위가 이어받는 대물림 정치를 가리킨다. 아무리 일본 사회 구석구석에 가업을 물려 가는 관습이 흔하다지만 정치마저 본을 뜬다는 사실은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니다.

‘무라(村)의 정치’라는 말이 일본 언론에 등장한 연유도 그 때문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끼리끼리 해먹는 ‘촌스러운 정치’를 빗댄 험담이다. 의리와 인정이라는 표현으로 슬그머니 눙치기는 했으되, 지연과 혈연을 끈끈이로 이용하는 낡디낡은 부락공동체 감각이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이 일본 정치의 불가사의다.

이번에는 평소의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그 존재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는 일본 왕실을 지나는 걸음에 잠깐 짚어보자. 일본어로 ‘덴노(天皇)’라 불리는 일왕은 헌법상 일본을 상징하되 통치하지는 않는다. 그 바람에 총리를 위시한 각료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거나 정기국회의 개회를 선포하는 따위의 의례적인 내정(內政) 행위와, 일본에 부임하는 외국 대사들로부터 신임장을 받는 절차상의 외교만 담당한다. 하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이따금 이 같은 일왕의 존재와 더불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일본 국기 ‘히노마루’와 국가(國歌)‘기미가요’를 떠올린다. 일제가 침략의 나팔을 불 때 앞장세운 심벌이 이 두 가지였던 탓이다.

패전 후 오랫동안 질시당했던 이 깃발과 노래는 최근 국기와 국가로서의 위치를 되찾았으며, 그 선봉에 선 이들이 우익 인사들이다. 어느 나라건 ‘애국심’이라는 당의정으로 교묘하게 포장한 위험한 내셔널리스트는 있기 마련이지만, 『국민의 역사』(산케이신문 刊)라는 책을 펴낸 일단의 그룹들은 약간의 정신적 착란상태까지 드러낸다. 예컨대 책 내용 중 이런 대목이 그렇다.

“조선총독부는 일한 합병 후 가장 먼저 근대화의 기초를 닦는 데 필요한 인구조사와 토지조사, 치산, 치수, 관개, 농업개량, 소작제도의 개선, 나아가서는 교육의 보급과 공평한 사법의 도입 등등을 어렵사리 해냈다. 그 이전의 조선반도는 소작인이 학대당하고, 귀족계급이 제 마음대로 다스리던 가련한 땅이었다. 우리는 유례가 없는 비극의 나라에 어리석게도 발을 담그고 말았다. 조선반도가 안고 있던 여러 고민, 똬리를 튼 한(恨), 분노와 절망… 솔직히 말해 애당초 손대지 않았더라면 제일 좋았을 뻔했다.”

적반하장의 파렴치에는 소름이 돋지만, 맞고함을 지르다가는 그들의 꼼수에 말리게 된다.

일부러 상대의 혈압을 올려 시빗거리를 만든 뒤 어리석은 대중을 자신들 편으로 끌어가려는 수작인 것이다. 묘수는 있다. 순진한 대다수 보통 일본인들을 앉혀두고 차분하게 진실을 들려주어 스스로 깨치게 하는 것이 최상의 대응법인 것이다.

 

일본인이 딴 12개의 노벨상

2005년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일본 정계에 하나의 혁명이 일어났다. 하필이면 그날이 9월 11일이었던지라 호사가들은 몇 해 전 뉴욕에서 발생했던 끔찍한 사건 ‘9·11’에 빗대어 “일본판 9·11의 광풍이 일본 열도를 휩쓸었다”고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괴짜라고 해서 ‘헨진(變人)’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 그는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우체국 민영화 법안이 참의원에서 부결되자 앙갚음으로 중의원을 해산해 버렸고(참의원은 헌법에 해산이 금지되어 있다), 9월 11일의 총선거를 통해 집권 자민당 역사상 두 번째로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국에서의 유사 이래 첫 대통령 탄핵과 그 후폭풍을 연상시키는 대(大)드라마였다. 그러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고집하는 등 우익 성향이 강한 고이즈미의 화려한 부활을 지켜보는 한국인들의 심정은 착잡했다. 그러면서 자꾸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도대체 ‘일본’이 왜 저러나?

2005년 봄의 ‘독도 파동’으로 한풀 기세가 꺾였다지만 그래도 일본에서의 이른바 ‘한류(韓流)’ 열풍은 식을 줄 모른다. 그런 반면 일본 서점가에서는 ‘만화 혐한류(嫌韓流)’라는 제목의 반한(反韓) 만화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불티나게 팔린다. 같은 민족끼리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괴이한 현상. 그러니 아무리 표리부동, ‘혼네(本音·본심이라는 뜻)’와 ‘다테마에(建前·겉으로 내세우는 원칙)’가 따로 논다기로서니 대관절 ‘일본인’을 어떻게 설명해야 옳은가?

본시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다. 대한해협과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한일 간의 긴 역사, 우여곡절의 교류 속에 ‘일본’이라는 피사체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도 이따금 착시 현상이 일어나곤 했다. 너무 가깝게, 너무 잦게 교통하면서 감성과 이성이 뒤섞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광복 60년을 넘기며 이제는 우리가 먼저 상대의 진면목을 살피는 여유를 가지는 게 어떨까. 그래서 짚어보는 현대 일본의 얼굴.

태평양전쟁 패전 후 불과 반 세기 동안 일본인들은 12개의 노벨상을 받았다. 1949년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가 첫 물리학상을 받은 이래 2002년 두 명의 수상자(화학상, 물리학상)가 한꺼번에 나오기까지 9개가 과학 분야의 수상이었다. 나머지는 2개의 문학상과 하나의 평화상이었고… 물론 노벨상이 유일한 지식의 바로미터는 아니리라. 하지만 아시아 여러 나라 중에서 어째서 유독 일본이 노벨 과학상을 독식하다시피 할까? 현대 일본의 하고많은 테마 가운데 하필 ‘교육’을 뒤지고 싶은 연유도 여기에 있다.

1868년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계기로 일본은 그동안의 태도를 확 바꿔 버렸다. 어제까지의 스승을 팽개치고 미국과 유럽에서 가르침을 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첫 대규모 유학단은 1871년 11월에 파견한 구미 사절단이었다. 유학생 60명에다 메이지 정부의 각료 3명, 그리고 각료급 실력자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함한 108명의 사절단은 2년 가까이 서양 문물에 탐닉했다.

이때에도 일본인들은 예전과 다름없는 방법을 구사했다. 즉 해외 유학생 파견과는 별도로 수많은 외국인 전문가를 일본으로 불러들여 배움을 청했던 것이다. 그 영역은 새 국가 건설을 위한 분야가 망라되었다. 가령 군대를 육성할 목적으로 영국과 독일 군인을 초빙했다. 해군은 영국군, 육군은 독일군에게 교육을 맡겼다니 그 치밀성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초등에서 중등학교까지의 신식 교육은 미국식을 채택했다. 미국 교육학자 데이비드 머레이(David Murray)를 불러와 기틀을 다졌다.

이런 식으로 외국에서 불러들인 전문가가 1만 명이 넘었다. 6000여 명의 영국인이 가장 많았고, 3000명 가량의 미국인, 900여 명의 독일인, 600여 명의 프랑스인, 그리고 40여 명의 이탈리아인 순이었다. 당시 일본 인구를 약 3500만 명으로 추산하자면 얼마나 많은 외국인이 일본 땅으로 쏟아져 들어왔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겠다.

이른바 국립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설립된 시기는 메이지유신 직전인 1863년이었다. 이미 통치력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에도(江戶) 막부가 세운 개성소(開成所)가 그것이었다. 여기서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이른바 ‘양학(洋學)’을 가르쳤다. 또 같은 해에 서양 의학을 다루는 의학소(醫學所)를 별도로 설립하기도 했다. 메이지유신 후 이 두 학교를 합쳐서 도쿄대학을 창설했다.

 

대학교가 많은 이유

일본이 서양식 학제를 정식으로 도입한 것은 1872년이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모든 마을에 불학(不學)의 가정이 없고, 모든 가정에 불학의 인간이 없도록 한다”고 선언했다. 그 후 1900년에는 여섯 살부터 4년 동안의 의무교육제도를 시행했고, 1907년에는 이를 다시 2년 더 늘렸다. 일본이 오늘날처럼 중학교 3학년까지 9년간의 의무교육을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이다.

여기서 잠깐 일본의 대학교육 역사를 살펴보자. 앞서 말한 대로 메이지유신 직후 미국과 유럽을 돌아다닌 구미사절단은 새 국가 건설을 위한 합숙 연수여행을 떠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내심 유럽을 좀더 돌아다니며 공부하고 싶었으나 본국의 빗발치는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귀국했다.

그동안의 견문을 바탕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내각제를 도입하여 의회를 세운 뒤 초대 국회의장에 취임했다. 1886년에는 도쿄대학을 제국대학으로 개명하여 본격적인 인재양성에도 착수했다. 처음에는 달랑 하나로 시작했으나 턱없이 모자라 각지에 또 다른 제국대학을 설립하면서 이름에다 지명을 붙였다. 도쿄제국대학, 교토(京都)제국대학, 그리고 훗날 식민지 한국에는 경성(京城)제국대학이 생겨났다.

현재 일본에는 170여 개에 달하는 국공립대학, 500개에 육박하는 사립대학과 그와 비슷한 숫자의 2년제 단기대학이 있다. 숫자만으로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 물론 많다고 해서 교육 수준마저 높다고 단언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150년을 넘겨가며 차곡차곡 쌓아온 현대식 교육의 연륜이 노벨상의 수치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게다가 일본인의 교육열도 예사롭지 않다. “일본에서는 거지도 읽고 쓸 줄 안다”고 으스대던 고이즈미의 말을 통계자료가 입증하고 있다. 취학률이 초·중등학교 100%, 고교 96.9%, 대학 48.6%, 대학원 10.3%이다(2001년도). 10명 가운데 6명 이상이 유치원을 거치기도 한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일본정부는 향후 50년 동안 3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더 배출하겠노라는 야무진 꿈을 밝혔다. 반면 교육계는 2007년이면 대학 정원과 수험생 숫자가 똑같아지는 등 질(質) 저하에 따른 ‘교육의 위기’를 거론하며 대학 간의 통폐합에 시동을 걸었다. 이 역시 부자 몸조심하는 듯한 엄살이 섞인 온탕, 냉탕 오가기로 비치기도 하지만,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무엇인가가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우리의 또 하나의 이웃인 중국은 이미 현대 일본의 힘을 꿰뚫고 있다. 중국과학원연구팀이 발표한 ‘중국 현대화 보고 2005’에는 중국이 일본과 50년의 차이가 난다(2001년 시점)는 고백이 실려 있다. 은근히 중국인다운 과장이 드러나는 수치이긴 하나, 속셈이 어디에 있는지는 불문가지다. 이래서 더욱 중요한 지피지기(知彼知己), 우리의 일본 해부가 본궤도에 오를 날이 기다려진다.

주마간산으로 훑어본 일본의 이모저모. 무엇보다 우리는 아무리 밉더라도 우선은 남의 좋은 점부터 살펴 귀감으로 삼는 자세를 갖는 게 낫다. 그것이 어른스러움이다. 그것이 진짜 이기는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지일 작가였던 김소운(金素雲) 님의 한 말씀을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다.

“일본에 대한 민족감정 하나를 언제까지나 버리지 못하는 그런 옹졸한 백성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알고도 너그러이 잊어버리는 것과, 흐지부지 소가지 없는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만치 뜻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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