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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한민족사 학술지

'역사에 대한 인식은 미래를 반영하는 거울' 한일 고대사를 제대로 알고 이를 학생들과 이웃, 후세들에게 정확히 전달해 올바른 역사관을 형성하고 세계 속에 당당한 한민족으로 우뚝 설 수 있길 기대합니다.

 


<조선통신사> 조선통신사 - 손승철
이름 :
손승철
소개:
강원대 사학과 교수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 일본 도쿄대학, 홋카이도대학 연구교수를 지냈다. 한일관계사학회 회장,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강원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시대 한일관계연구』『근세조선의 한일관계연구』『조선통신사와 한일관계』『한일관계사료집성』(전32권) 등이 있다.
E-mail :
son404@kangwon.ac.kr

 

조선통신사와 일본국왕사

1392년 건국한 조선왕조는 왜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를 동아시아 국제관계와 연계해 해결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동아시아 세계는 명나라가 힘의 축이었는데, 조선과 일본은 각기 1403년과 1404년에 명의 책봉을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상호간에 사절을 교환하여 외교관계를 성립시켰다. 이로써 조선은 명에는 사대(事大), 일본에는 교린(交隣)이라는 외교정책의 기본 틀을 세웠다. 이때부터 1592년 임진왜란 때까지 조선에서는 17회의 사신을 일본에 파견했고, 일본에서는 71회의 사신을 조선에 파견했다. 조선 사절을 처음에는 ‘보빙사(報聘使)’라고 했으나, 1428년부터는 ‘통신사(通信使)’라고 했고, 일본 사절은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교린의 용례를 보면, 신(信) 도(道) 의(義) 예(禮)라는 유교적 실천규범을 전제로 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교린지신(交隣之信)’ ‘교린지도(交隣之道)’ ‘교린지의(交隣之義)’ ‘교린지례(交隣之禮)’의 개념을 체계화했다. 즉 교린이란 신의(信義), 도리(道理), 의리(義理), 예의(禮義)라는 유교적 가치기준을 전제로 하는 외교이며, 통신사는 이러한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신의를 하는 사절’이다. 한편 일본국왕사의 파견 횟수가 많은 것은 이들 중 상당수가 위사(僞使·거짓 사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막부 장군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 왜구를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왜구의 우두머리들에게 외교와 군사의 양면정책(삼포 개항, 대마도 정벌 등)을 실시하여 통교제도를 완성시켰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는 일본으로부터의 모든 왕래자(통교자)를 4등급, 즉 일본국왕사, 거유사(巨酋使),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 對馬島主), 제유사(諸酋使)로 나누고 있다. 이들은 삼포로 입항한 뒤 조선의 통제하에 무역을 하면서, 그 우두머리들은 상경하여 조선국왕을 알현하는 상경(上京)제도를 의무화했다. 이것은 중국의 기미정책보다도 훨씬 적극적인 것으로, 중국에 대해서는 사대정책을 쓰면서, 주변의 여진, 왜, 유구, 안남 등에 대해서는 조선 중심의 국제질서를 세우려는 것으로 조선 외교의 주체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삼포를 통해 어떠한 물자의 교류가 이루어졌을까. 조선에서 일본으로 가져간 물품은 쌀이나 콩 등 식량류와 명주, 면포였다. 일본에서 면포를 선호한 것은 당시 일본에서는 목화 재배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조선 면포가 감촉이 좋은 고급의류로서 선호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주 상품은 구리인데, 조선에서는 놋쇠로 만든 식기를 사용했고, 동전과 금속활자 등 구리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남방산 소목(蘇木)과 물소뿔, 후추 등이 수입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은 일본에 대하여 이원적인 교린정책을 썼다. 즉 조선국왕과 막부 장군 간에는 대등교린,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왕래자는 대마도주를 대변자로 하여 통교권을 부여하는 기미교린의 이원체제로 운영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적인 틀이 통신사의 왕래에 의해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우호교린의 교류관계도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으로 단절되고, 이후 7년간의 전쟁과 그로 인한 전쟁의 상처는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각인시켰다.

 

조선 후기의 통신사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4년 조선에서는 도쿠가와 막부의 강화(講和)에 대한 진의를 살피기 위해, 승려 유정(사명대사)을 탐적사(探賊使)란 명칭으로 일본에 파견했다. 사명대사 일행은 교토에 가서 도쿠가와 장군의 강화에 대한 의지를 확인하고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온다. 사명대사 일행의 귀국 후, 조선에서는 강화를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즉 일본국왕 명의의 강화요청서, 임란 당시 왕릉도굴범의 소환, 그리고 조선 포로의 송환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은 국왕 명의의 국서를 위조하고, 왕릉도굴범은 대마도의 잡범으로 대치했으며, 쇄환사편에 포로 7000여명 이상을 돌려보냈다. 물론 조선에서는 국서가 위조된 것이고, 도굴범도 잡범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조선의 요구가 형식적으로는 수용되었기 때문에 1607년 강화사를 파견하여 국교를 재개했다. 하지만 사절단의 명칭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다. 이로부터 조선 후기에는 총 12회의 조선사절이 파견되는데, 통신사 명칭이 다시 사용된 것은 세 번째인 1636년부터이다.

통신사의 파견 목적은 막부 장군의 습직이나 양국 간의 긴급한 외교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통신사의 편성과 인원은 각 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 300명에서 500명이 넘는 대사절단이 5개월에서 8개월에 걸친 대장정을 나섰다. 이들은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육로로, 그리고 부산에서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까지는 해로로, 오사카에서는 다시 육로로 에도(江戶·도쿄)까지 왕래했다.

이러한 통신사가 조선 후기 한일관계에서 갖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정치외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통신사가 통과하는 객사에서의 한시문과 학술 교류는 한일 간의 문화상의 교류를 성대하게 했다. 그래서 조선통신사를 ‘조선시대의 한류(韓流)’로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통신사가 한일관계의 전부는 아니었다. 조선에서는 부산에 왜관을 설치하여 한일 간에 무역을 통하여 필요한 물자를 교류했으며, 또 대마도주에게는 별도로 100명에서 150명 규모의 역관사(譯官使)를 51회나 파견해 한일관계에서 대마도의 입지를 세워주고, 한일 간의 현안을 풀어갔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은 매우 적극적이며 주체적으로 한일관계를 전개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조선 전기와 달리 조선 후기에는 일본에서는 장군의 사신이 오지 않고 조선에서만 사신이 파견되었다고 해서 조선외교의 열세를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임진왜란 때 과거 일본국왕사의 상경로가 일본군의 진격로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일본인의 상경을 금지시키고, 부산 왜관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통신사 파견의 비용은 부산에서부터는 모든 왕복 비용을 일본에서 부담하였는데 그 비용이 막부의 1년 예산이었다고 한다.

한편 일본과 조선 무역에는 기본적으로 대마도주가 조선국왕에게 보내는 봉진(封進)과 구청(求請)에 대한 회사(回賜), 조선왕조와 대마도 간의 공무역(公貿易), 대마도 관리·상인과 조선상인 간의 사무역(私貿易) 등이 있었는데,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물품은 주로 은·동 등의 광산물과 남방산 소목, 물소뿔과 백반, 후추 등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에서 수출한 품목은 쌀과 콩, 목면이 많았고, 인삼과 중국산 생사, 비단도 인기 있는 상품이었다. 이러한 물자의 유통경로를 ‘실버로드와 실크로드’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신사행(通信使行)도 1811년에 끝이 나며, 그것도 대마도에서 약식으로 국서를 교환하는 역지통신(易地通信)이었다. 물론 그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장군직을 습직하였고, 그때마다 통신사 파견이 요청되었으나, 일본 내의 사정에 의해 4차례나 연기하다가 결국 1868년 메이지유신을 맞게 되고, 한일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이로써 통신사로 상징되었던 조선시대의 우호교린의 교류도 끝이 났다.

통신사로 상징되는 조·일 교린관계의 종말은 메이지유신을 알리는 일본 측의 서계로부터 비롯되었다. 메이지유신 직후 일본에서는 천황의 집권사실과 함께 메이지 외무성에서 한일관계를 전담한다는 서계를 보내왔다. 그런데 서계의 양식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일본 천황을 한 단계 위에 놓고, ‘천황 대 조선국왕’의 외교를 할 것을 요구했다. 조선에서 외교관례상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에서는 장군이 집권하건 천황이 집권하건 그것은 일본 국내의 사정이므로 조선은 단지 일본의 최고집권자와 대등한 관계를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결국 일본은 무력을 앞세워 1872년 부산 왜관을 점령했고, 이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침략외교에 의해 교린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조선 전기 통신사에 의한 200년간의 교린관계가 임진왜란에 의해 깨진 것처럼, 조선 후기 260여년간 교린관계도 일본의 일방적인 왜관점령에 의해 종말을 고했다. 교린관계의 붕괴과정은 다르지만 일본의 일방적인 무력침공이라는 똑같은 형태가 반복되었던 것이다.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의미

조선시대 전후기 460여 년에 걸쳐 양국 사이에서 조선통신사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는 매우 크다. 조선통신사를 통해 양국은 외교 문제를 해결했고 물자와 문화교류를 했으며, 그 결과 선린우호관계를 계속할 수 있었다. 물론 중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이라는 불행한 역사도 있었지만 통신사를 통해 우호교린관계를 회복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통신사는 조·일 양국이 함께 연출한 성숙한 국제의식의 표현이었다.

조선통신사가 원활하게 왕래할 때는 양국 사이에 우호·공존의 시대가 전개되었고, 조선통신사의 단절은 양국 사이에 불행한 역사의 시작이었다.

한일 양국에서는 20세기의 불행을 극복하고 21세기의 출발을 새롭게 하자는 의미에서 2005년을 ‘한일 우정의 해’로 정했다. 그러나 연초부터 독도와 역사교과서 문제로 갈등을 거듭하고 있다.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전개를 통해 진정한 의미의 교린이 무엇인지, 재조명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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