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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한민족사 학술지

'역사에 대한 인식은 미래를 반영하는 거울' 한일 고대사를 제대로 알고 이를 학생들과 이웃, 후세들에게 정확히 전달해 올바른 역사관을 형성하고 세계 속에 당당한 한민족으로 우뚝 설 수 있길 기대합니다.

 


<기마민족 정복국가설> 기마민족 정복국가설 - 이도학
이름 :
이도학
소개: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사학과 대학원에서 ‘백제집권국가 형성과정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연세대와 한양대 사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로 재직 중. 부여군 문화재위원과 부여군 도시계획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살아 있는 백제사』『한국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고대 문화산책』 등 10여 권이 있으며, 논문은 「한국사에서의 정복국가론」「백제의 교역망과 그 체계의 변천」 등 101편이 있다.
E-mail :
dhym1216@hanmail.net

 

기마민족의 일본 진출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후인 1948년 좌담회 석상에서였다. 당시 도쿄대학 교수였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는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이라는 가위 폭탄적인 주장을 제기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놀랄 만한 기동성을 생명으로 하는 기마민족이 만주 지역에서 한반도를 경유한 후 일본 열도로 진입해 통일국가를 실현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 천황가의 기원을 여기에서 찾고는, 자신의 주장을 ‘기마민족정복국가설’이라고 명명했다. 이 학설은 전전(戰前)에는 감히 입도 뗄 수 없었던 일종의 터부를 건드린 것으로서 쇼킹 그 자체였다.

에가미에 따르면, 유목민족에서 기마민족으로 급변(急變)하게 된 계기는 기동성을 핵으로 한 기마전술의 도입이었다고 한다. 광대한 풀밭과 많은 말들을 사육하는 기마민족에 비해 농경민족은 그 정반대 조건에 놓여 있었다. 도시를 비롯한 고정된 취락에서 살던 농경민족이 아무리 튼튼한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고 하더라도 보통 그 허술한 곳을 틈타 기습하는 기마민족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중국 한(漢)의 1개 군(郡)밖에 되지 않는 적은 인구의 흉노에게 한 제국 전체가 오랜 기간을 시달린 것이다. 그런데 이 학설의 주체인 기마민족은 스키타이계의 기마민족 문화와는 다른, 3~5세기 무렵의 중국화된 호족(胡族) 문화의 주인공인 흉노·선비·오환·부여·고구려를 가리킨다. 이들은 말 타고 활 쏘는 기사(騎射)에 적합한 마구(馬具)·도검(刀劍)·궁시(弓矢)·복장(服裝)·갑주(甲胄) 등에서 강렬한 특색을 보이고 있다.

실제 부여나 고구려의 시조는 물론이고 고구려왕들은 활을 잘 쏜다거나 기마에 능했고, 뛰어난 말 감별 능력을 갖추었다. 고구려는 49년에 중국 베이징 근방인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 등지를 급습했다. 당시 고구려 군대가 국경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그 거리는 왕복 7000~8000리에 이른다. 이러한 대원정은 빼어난 기마술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에가미가 주창한 기마민족정복국가설의 요지는 부여·고구려 계통의 기마민족이 남하한 후 한반도 남단의 금관가야를 발판으로 기타규슈로 진출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이들은 다시 기나이 지역에 진출하여 일본 열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실현했다고 한다. 이 학설은 문헌자료 외에 고고학·민족학·언어학적 방법론을 폭넓게 적용하여 체계화시킨 것이다. 이러한 기마민족설은 한반도의 천손강림설화가 일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점에 착안했다. 즉, 『삼국유사』 6가야 건국설화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천손 니니기노미코도의 천강(天降)신화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가령 지배자가 모두 천손의 명을 받아 천강하였고, 하늘에서 포(布) 같은 것에 싸여 내려오고, 천강 지점이 ‘구지’와 ‘구지후루’ 봉(峰)으로 서로 음이 같다. 그리고 시조인 진무(神武)천황의 동정(東征)설화는 바다를 건너 새로운 땅에 건국했으며, 바다에서는 거북의 도움으로 무사히 건널 수 있었고, 시조의 아버지는 하늘이고, 그 어머니는 해신(海神)의 딸이라고 했다. 이는 강(江)과 연계된 동명왕의 남하건국설화와 대강의 줄거리가 일치한다. 이처럼 일본 건국신화에 부여와 가야계 설화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곧, 부여 계통의 기마민족이 남하 도중 일시 가야 지역에 정착하여 연고를 맺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가설은 고고학적으로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가령 고고학적으로 볼 때 일본에 통일정권이 형성된 시기는 후기고분시대(5세기 말~7세기 말)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 시기 고분들에는 한반도계의 무기, 마구, 호사한 장식품 등이 잔뜩 부장되어 있다. 이는 전기고분(3세기 말·4세기 초~5세기 말)의 부장품이 보기적(寶器的)이고 주술적인 것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곧 동북아시아의 기마민족문화가 금관가야를 경유하여 일본 열도로 진출한 증거라는 것이다. 에가미는 1992년, 45년간에 걸친 자신의 학설을 마무리하면서 김해 대성동 고분군을 부여계 기마민족의 능묘로 간주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한꺼번에 확인된 목곽묘, 순장 습속, 호랑이 모양 띠고리·오르도스형 청동솥의 존재가 그것을 명료하게 입증해 준다고 결론지었다.

에가미에 따르면, 금관가야(임나)에 정착했던 기마민족은 4세기 전반기에 기타규슈로 진출하게 된다. 이때의 영도자는 『일본서기』에서 제10대로 기록된 슈진(崇神)천황이며, 앞서의 천손강림신화는 이 단계의 이동을 반영한다고 했다. 슈진 천황을 임나(任那·미마나)의 궁성에 거주한 천황이라는 뜻의 ‘미마키(御間城)천황’으로 호칭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임나의 어원이 슈진 천황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 것은, 그가 영도하는 기마민족이 임나에서 출원했음을 시사해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슈진 천황을 『일본서기』에서는 ‘어조국(御肇國)천황’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는 문자 그대로 ‘일본국을 시작한 천황’이라는 의미이므로 실질적인 야마토 정권의 창시자임을 뜻한다고 보았다. 이 슈진 천황이 영도하는 기타규슈의 기마집단은 바다 건너 임나에 걸친 왜·한(倭·韓) 연합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는 고구려에 대항하는 한반도 남부 여러 세력의 작전권을 주도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이들 집단의 영도자로서 제15대로 기록된 오진(應神)천황은 기마집단을 이끌고 기타규슈에서 오사카 지역으로 진출하여 일본의 통일국가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오사카 지역의 대형 전방후원분인 오진 천황릉과 닌도쿠(仁德) 천황릉 등은 규모에서 이집트 피라미드에 필적하는 거대 건조물이다. 이는 절대 권력을 과시한 야마토(大和) 정권의 엄연한 존재와 더불어 통일국가의 기초가 확립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대체로 이같은 요지의 웅장한 스케일과 박진감 넘치는 기마민족설은 대세론적인 입장에서 크게 주목되는 획기적인 학설임에 틀림없다.

한편 와세다 대학 교수였던 미즈노 유(水野祐)가 1966년에 ‘네오(Neo) 기마민족설’을 제기했다. 이 학설은 한반도계의 정복왕조가 남(南)규슈에 세운 구노국(狗奴國)이 기타규슈에 있던 야마다이국(邪馬臺國)을 정복하고, 4세기 중엽에는 기나이 서쪽인 혼슈 서반부를 통일한 원(原)야마토(大和)국을 타도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구노국은 명실공히 서일본의 통일국가가 되었지만, 기나이 지역으로 천도하지 않고 규슈에 거점을 두었다고 한다. 그것은 4세기 말부터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의 남진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적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한 구노국은 규슈 지역과 연락이 편리한 세토나이카이만(灣)에 위치한 기나이의 야마토 지역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때가 오진 천황을 이은 닌도쿠 천황 때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기나이 지역의 후기 고분(5세기 말~7세기 말) 출토품이 전기와 달리 그 성격이 급변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사와 관련한 기마민족 정복국가설은 1988년 필자가 백제사에서 구체적으로 제기한 바 있다. 백제에 온조와 비류, 2명의 시조가 존재하는 것은 2개 왕실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왕실 교체를 암시한다. 이와 관련, 백제 건국기의 주(主)묘제는 토광묘인 데 반해, 서울 지역에 등장하는 남만주 계통의 전형적인 적석총은 4세기 후반경에, 그것도 완성된 묘제로서 돌연히 등장한다는 점에 필자는 주목했다. 이는 곧 묘제의 단절을 뜻하는 동시에 왕실 교체를 뒷받침하는 물증으로 해석된다.

4세기 중후반 근초고왕대의 백제는 단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칠 줄 모르는 운동력을 가지고 팽창했다. 백제가 북방의 웅국(雄國) 고구려를 꺾고, 마한과 가야제국을 제압했던 힘은 강력한 중장(重裝) 기병전술에 기인한 것이었다. 근초고왕대의 ‘친정(親征)→약탈→분배’라는 전쟁 양식 역시 유목형 군주들의 전쟁 수행 방식과 동일하다. 또 백제왕을 가리키는 호칭인 ‘건길지’·‘코니키시’·‘코키시’는 돌궐에서 천자(天子)를 가리키는 ‘?키시’와 연결된다. 게다가 흉노는 물론이고 돌궐 등 유목 기마민족 사회의 직제인 좌우현왕(左右賢王)제도가 백제에서 확인된다. 백제금동대향로에 보이는 빡빡 머리인 독두(禿頭) 역시 기마민족 사회의 두발 형태이다. 그러고 보면 백제 성씨 가운데 난씨(難氏)의 계통을 유목 기마민족인 오환족에서 찾는 주장과 더불어, 백제 조정의 단씨(段氏) 역시 선비족 계통의 단부(段部)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백제에 서식했던 사막지대의 운송 수단인 낙타와 초원 지대의 가축인 양(羊)의 존재 또한 기마민족체제에서 출발한 백제의 정체성을 웅변해 준다.

 

적석목곽분의 주인공은 기마민족

신라사에서의 기마민족 정복국가설은 먼저 김병모(金秉模·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신라 적석목곽분의 계통을 알타이 지역의 파지릭 고분군과, 그리고 신라 금관의 계통을 중앙아시아 지역의 관모(冠帽)와 연결지어 생각한 데서 출발한다. 이종선(李鍾宣·경기도박물관장)씨는 오르도스 철기문화의 주인공들이 한(漢)의 팽창으로 일파는 서쪽으로 이동해 헝가리, 즉 훈족의 나라를 세웠고, 동쪽으로 이동한 일파는 한반도뿐 아니라 일본 열도에까지 상륙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라 적석목곽분의 주인공들은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거쳐 동남진(東南進)한 시베리아계 주민의 후예로서, 시베리아-오르도스계의 대형 적석목곽분과 철기, 승석문(繩席文)토기, 금 세공기술을 가지고 남하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추정은 오르도스문화의 전형과 신라의 주된 묘제인 적석목곽분뿐 아니라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상이 서로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한 결과였다.

최병현(崔秉鉉·숭실대 사학과) 교수 또한 적석목곽분의 기원을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 지역에서 비롯해 그와 기본 구조가 동일한 북아시아 초원지대의 목곽분 문화에서 찾았다. 즉, 동아시아의 민족 대이동기에 적석목곽분을 묘제로 하는 기마민족의 일파가 4세기 전반기에 경주에 도달한 결과, 신라에서 김씨 왕조가 성립되고 마립간(麻立干)이 등장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러한 추론은 신라 적석목곽분의 구조가 발전 과정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형으로 나타나고 있고, 부장된 유물 간의 친연 관계, 4세기 중엽 이후 신라의 급격한 영토 팽창 등에 근거하고 있다.

가야사에서의 기마민족 정복국가설은 신경철(申敬澈·부산대 고고학과) 교수가 제기했다. 그는 자신이 발굴한 김해 대성동 29호분의 성과를 토대로 3세기 말에 순장이나 후장(厚葬)과 같은 정신 문화와 더불어 금공품과 도질토기, 오르도스형 청동솥, 굽은 칼(曲刀)과 장례 후 목곽을 불에 그슬리는 습속, 보요(步搖)가 달려 있는 북방 유목민족 계통 관(冠), 마구와 갑주 등에 주목했다. 이같은 ‘3세기 말 대변혁’의 배경으로는,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으로 파국을 맞아 동만주로 이동해 간 부여계 일파가 동해를 이용해 김해 지역에 등장했고, 이것이 곧 금관가야의 성립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지금까지 소개한 기마민족 정복국가설은 스케일의 웅장함과 더불어, 논리 전개의 역동성을 뒷받침해 주는 고고학적 물증과 문헌 고증까지 제시되고 있다. 일각의 냉소적 시각이 없지 않지만, 한국사의 폭과 무대를 크게 확대시켜 줬다는 점에서 한국 역사학 발전에 신선한 자극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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