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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한민족사 학술지

'역사에 대한 인식은 미래를 반영하는 거울' 한일 고대사를 제대로 알고 이를 학생들과 이웃, 후세들에게 정확히 전달해 올바른 역사관을 형성하고 세계 속에 당당한 한민족으로 우뚝 설 수 있길 기대합니다.

 


<임나일본부설의 탄생> 임나일본부설의 탄생 - 신형준
이름 :
신형준
소개: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한 뒤 고려대 문화재학과에서 석사 학위 취득. 석사 논문은 ‘석굴암이 루트 2의 수학적 비례미에 의해 건축됐다’는 학계의 통설을 수치 검증을 통해 반박한 것으로, 아직까지 학계의 재반박은 없다. 1990년 조선일보사에 입사, 현재 문화부에 근무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한국 고대사에 대한 반역』이 있다.
E-mail :
hjshin@chosun.com

 

왜(倭)의 한반도 남부 지배(?)

한일 고대사의 핵심쟁점 중 하나가 ‘임나일본부설’이다. 요약하면 서기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당시 일본의 지배왕조라고 할 수 있는 왜(倭)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주장이다.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일본서기』 기록에 의거한 이같은 주장은 일본이 급격한 근대화를 겪었던 메이지시대(19세기 중·후반) 때도 몇몇 학자들에 의해 이미 제기됐다. 그러다가 2차 대전 패전 이후, 일본의 스에마쓰(末松保知)에 의한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한반도 남부 경영론)’으로 학문적으로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주장의 바탕은 『일본서기』에 신공황후(神功皇后·섭정을 통한 재위 201~269년)가 섭정 재위 9년(서기 209년) 10월, 신라를 정벌하고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기록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연표를 작성하면 신공황후의 재위는 201~269년이다. 그러나 신공황후 65년조(서기 265년)에 따르면 백제 침류왕이 사망하고 진사왕이 즉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는 서기 385년의 기록이다. 때문에 신공황후조 등 일본서기 초기 기록은 120년을 더해서 계산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신공황후 9년은 서기 209년이 아니라 329년인 셈이다.

 

『일본서기』의 당시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해(신공황후 9년) 10월 3일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군이 화이진(和珥津·대마도로 추정)을 출발했다. 풍신(風神)과 해신(海神)이 파도를 일으키며, 바람이 순풍을 불게 하고, 바다 속 큰 고기들이 다 떠올라 (신라를 정벌하러 가는) 배를 도왔기 때문에 노를 쓸 필요도 없이 신라에 이르렀다. 신라왕은 전율하며 두려워 싸울 마음을 잃었다. 신라왕 파사매금(서기 329년이 맞다면 신라 흘해왕이 된다)이 금과 은, 비단 등의 조공을 배 80척에 실어 귀환하는 일본군편으로 보냈다. 이후 신라왕은 항상 80척의 배로 조공을 일본에 바친다.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왕(서기 329년이 맞다면 고구려 미천왕, 백제 비류왕)은 신라가 지도와 호적을 거두어 일본에 항복했다는 것을 듣고 가만히 그 군세를 엿보았다. 도저히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나라 바깥으로 나와서 머리를 땅에 대고 앞으로 길이 서번(西蕃·‘서쪽의 제후국’이라는 뜻)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한 『일본서기』 49년(삼국사기와 비교해 시기를 보정한다면 서기 369년)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일본이 다시 신라를 치려 했다. 두 장군을 보내 신라를 격파했다. 그리고 비자벌, 남가라, 안라, 다라, 가라 등 7개국을 평정했다. 그 뒤 군사를 옮겨 서쪽을 돌아 고계진(古溪津)에 가서 남만(南蠻)의 침미다례(?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근초고왕을 말함)와 왕자 귀수(훗날 백제의 근구수왕)가 일본을 향해, 항상 일본에 대해 서번이라 칭하며 봄가을로 조공하리라고 했다.’

이같은 기록을 바탕으로 서기 4세기 중엽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서기 6세기 중엽 신라가 이 지역을 평정할 때까지 임나일본부를 두어 통치했다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의 요체다.

 

김석형의 분국설(分國說)

그러나 1960년대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의 주장이 제기되면서 ‘임나일본부설’은 변화를 겪는다. 그는 서기 4~5세기 왜는 백제와 가야 등 한반도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그들은 모두 한반도에 뿌리를 둔 소국(小國)들이었으며, 따라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한반도 관련 기사는 일본 열도 내부의 한국계 소국들의 일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분국설’이다. 이렇게 분열됐던 왜는 서기 6세기 초 백제 계통의 소국으로 보이는 야마토(大和)정권에 의해 통일됐다. 임나일본부는 결국 이 시기 야마토 정권이 일본 열도 안에 있던 임나 소국에 설치한 지배기관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일본 학계는 임나일본부 설치 시기를 서기 5~6세기대로 축소하거나, 임나일본부를 군사적 측면에서보다는 외교나 교역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등으로 바뀌어갔다. 최근 일본의 한 학자(鈴木英夫)는 서기 6세기 전반 왜가 한반도로부터 문화 등을 수입하는 대신 백제에 군사를 파견하거나 무기를 공급하는 등의 관계가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물론 백제가 왜에 종속된 ‘종속적 동맹관계’였다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고대사 해석에서 ‘자국 중심주의’는 경계해야 할 것으로 본다. 만약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경영했다면, 일본서기에서조차 보이는 백제나 신라로부터의 숱한 ‘문화적 수출’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일부 일본학자들의 주장처럼, 군사력과 문화력이 과연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대다수의 일본인 학자들조차 철기 문화는 한반도에서 도래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철기 문화야말로 군사력과 직결되는 것 아니었을까?

따라서 삼국과 왜의 관계를 생각할 때 특정 문헌만 따져서 무언가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서기 720년 완성된 일본서기는 기본적으로 ‘일본적 관점’에서 썼을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 최고(最古) 역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우리의 관점’에서 기술됐을 것이다. 때문에 일본서기에 ‘신공황후 때 신라가 일본에 복속했다’는 표현을 ‘순도 100% 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반면, 일본서기에조차 ‘백제로부터 혹은 신라로부터 무엇 무엇이 전래됐다’고 표현됐다면 그것은 진실로 받아들일 만한 일일 것이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것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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