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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한민족사 학술지

'역사에 대한 인식은 미래를 반영하는 거울' 한일 고대사를 제대로 알고 이를 학생들과 이웃, 후세들에게 정확히 전달해 올바른 역사관을 형성하고 세계 속에 당당한 한민족으로 우뚝 설 수 있길 기대합니다.

 


고구려 백제·신라, 통일신라, 발해와 고대 일본 - 윤명철
이름 :
윤명철
소개:
동국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고구려 해양교섭사로 박사학위 취득. 현재 동국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사)고구려연구회 이사, 한국해양문화연구소장을 겸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역사는 진보하는가』『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장보고 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한민족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한국 해양사』『역사전쟁』『고구려의 정신과 정책』등 15권이 있으며, 역사 다큐멘터리 방송 출연 및 진행을 하고 있다.
E-mail :
E-mail: ymc0407@yahoo.co.kr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한국

 

고대국가 형성 배경

일본 고대사는 형성과 전개과정이 매우 복잡하므로 다음 몇 가지 인식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일본고대사와 한국고대사, 그리고 동아지중해사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진행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청동기·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야요이(彌生)시대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 혹은 3세기까지를 말한다. 이 시대가 끝나면서 역사시대가 되고, 이를 고훈(古墳)시대라고 한다. 한반도에 있는 4국은 일본 열도 내의 국가(통일되지 않았음)들에 비해 문화적으로 선진지역이고, 정치적으로 보다 견고한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 왜 세력들은 상황과 필요에 따라 적대와 경쟁 협력을 연출하는 가변적인 관계였다. 특히 한반도 내의 일부 세력들은 정치상황을 극복하고 영토의 확대와 세력의 확장을 목적으로 대외진출의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북으로 힘의 주력을 뻗쳐 경략하는 한편, 일본 열도로 진출하고 있었고, 가야와 신라의 남쪽 국가들은 일본 열도로 적극 진출했다. 새롭게 재편되어가는 동아시아의 현실과 힘의 역학관계로 볼 때 한일 양 지역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고, 그 힘의 주체 내지 능동성은 한반도에 있었다.

이때 집단 진출과 이주는 두 가지 형태를 띠었다. 하나는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지는 개별적인 이주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상의 차이를 둔 파상적인 이동이 아니라 한반도의 정치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조직적이고도 지속적인 이동과 진출이었다.

가야세력들은 한반도 남부의 부산이나 거제도에서 출발하면 쓰시마(對馬島)와 이키(岐)섬을 거쳐 비교적 수월하게 북부 규슈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찍이 야요이 문화가 시작되고 벼농사가 발달했으며, 소국가의 형성이 비교적 빨리 시작된 곳이다. 중국의 고대 사서 등에서 왜로 들어가는 입구로 기술된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이 지역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주민들의 진출이 있었는데 가야가 성립된 이후에는 이들을 가야계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가야계 세력들은 4세기에 이르러 기마전의 능력과 철제 무장을 갖춘 기마군단 혹은 기마병을 보유한 보병 및 수군을 동원해 일본 열도를 정복했다. 복천동 등에서 발견된 가야계 유물과 전방후원분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유사성을 보이고 있는 것은 고대국가를 성립시킨 기마민족이 가야계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江上波夫,『기마민족국가』). 쓰시마를 비롯하여 규슈의 북부 지역에는 가야와 관련된 유적, 유물과 함께 유사한 지명들이 많다. 규슈 북부인 하카다만 옆의 가라쓰만(唐津灣)은 ‘가라의 항구’라는 뜻으로서 한자 표기도 원래는 韓津이었다. 그 외에 이 만을 굽어보는 가야산(可也山)이 있고, 게야(芥屋), 가라도마리(唐泊) 등의 지명이 있다.

북부 규슈지역은 『일본서기』신대(神代)편을 보면 신라 세력의 진출도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던 것 같다. 동해 남부지역을 출발하여 쓰시마를 경유한 다음에 도착한 경우도 있고, 직접 이즈모 등에 도착한 집단이 연안을 따라 내려오다 북부 규슈에 정착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5세기 이후에는 백제계가 이곳 규슈를 통해 일본 열도에 본격 진출했다.

그러나 적어도 5세기 이후에는 백제인들의 진출과 교류가 매우 빈번해진다. 특히 불교의 전래와 관련해 승려와 건축 기술자 등이 많이 파견됐다.

 

해류와 조류, 바람을 이용해 일본 진출

신라계 세력들은 동해 쪽에서 출항, 혼슈 남단의 이즈모(出雲)와 중부의 쓰루가(敦賀) 등에 상륙했다. 위도상으로 경상남도 울산이나 포항지방과 거의 비슷한 위치이다. 해류와 조류의 흐름을 타고 계절풍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 항해가 가능하다. 신라계로서 일본신화 초창기에 나오는 스사노노미고도의 이야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전설은 일본신화의 아메노히보고(天日槍) 설화와 동일하여 이즈모 지역에 대한 신라계 세력의 진출을 강하게 암시한다.

물론 왜의 신라 진출도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박혁거세 8년(기원전 50년) 때부터 이미 왜인의 침입 기사가 보이며 박혁거세 거서간 때의 재상 호공(瓠公)은 박을 타고 왜국으로부터 건너왔다는 기사가 있다. 그런데 이때 침입한 왜인들은 규슈나 혼슈 남단에 거주한 집단들로 쓰시마를 경유해 침입한 듯하다. 그들이 침입한 계절이 남동풍을 수반한 4~5월경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즈모(出雲)와 기히(吉備) 등지에서는 전방후원분 등 비교적 큰 규모의 고분들이 다수 발견된다. 그러나 긴키 지방에 비해 규모나 수에서 뒤지고 있음을 볼 때 규슈를 거쳐 기나이(畿內) 지역에 들어와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국가를 건설한 기마민족과는 다른 계통인 것 같다. 이들은 이즈모 신화나 동탁의 분포에서 보듯 척량산맥을 넘어 기히 지방을 거쳐, 혹은 해안을 따라 북상을 하다가 비와호(琵琶湖)를 지나 서부 일본의 중심으로 나아갔다.

고구려는 원산 혹은 그 이북의 함흥만 근처 항구에서 출항했을 것이다. 이들은 해안을 따라 내려오다가 삼척 부근에서 먼 바다로 나가 일본 열도 혼슈 중부 이북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혹은 동해 남부 해안에서 출항했을 것이다. 늦가을부터 초봄에 걸쳐 부는 북풍 계열의 바람과 물길을 활용했으며, 귀환할 때에는 늦봄부터 여름에 걸쳐 부는 남서풍 계열을 이용했을 것이다. 도착한 지역은 위로는 노토(能登)반도의 북쪽으로부터 니가타(新潟), 이시카와(石川), 쓰루가(敦賀)를 거쳐 남으로는 이즈모(出雲)에 이른다.

공식 교섭은 應神 28년, 仁德 12년(324)과 58년(369) 계속해서 나타난다. 게타이(繼體) 천황과 긴메이(欽明) 천황 원년, 비다쓰(敏達)천황 2년과 3년 이들이 도착한 지점은 월국(越國) 혹은 월(越)의 해안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대에는 발해의 사(私)무역선들, 신라의 사무역선들도 이곳에 도착했다. 노토 반도에는 고구려 고분의 말각조정 양식을 가진 하이혈(蝦夷穴) 고분도 있어 고구려와 깊은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긴메이 천황 때는 고구려 사신과 도군(道君)이라는 월의 지방 호족이 밀무역을 했다고 다른 호족이 조정에 밀고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森浩一, 『古代史の 津津浦浦』). 나중에 혜자, 담징 등 고구려 승려들이 건너왔다.

이렇게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은 일본 열도로 진출했지만, 당시의 항해능력과 운송수단을 고려할 때 많은 숫자의 주민집단이나 군사가 한꺼번에 바다를 건너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소규모 집단이 비조직적이고 불연속적으로 진출, 선주민 집단을 이루었다. 이후 새로운 집단들이 계속해서 진출,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세력들의 규모가 커졌으며, 점차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추어갔다.

정착 집단들은 정치 문화적 성격이 일정하지 않다. 정치적 성격을 갖고 진출했는지의 문제도 있고, 정착한 후의 정치적 성격이 반드시 같은 것도 아니었다. 특히 비조직적으로 진출한 집단의 경우에는 상황과 필요에 따라 그 성격이 재조정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진출집단의 성격은 물론 이들의 성장과정 또한 중층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6세기에 들어 일본 열도는 야마토 조정을 중심으로 한 몇 개의 세력들로 재편되었고, 내부의 조건을 토대로 한반도와의 관계를 재조정했다. 일본 열도에 진출한 정치집단들의 모국에 대한 태도는 일반적으로 서로 상반됐다.

첫째는 종속(從屬)과 협력(協力)의 관계이다. 주민들은 한반도에 대해서 실리추구라는 면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모국이 가진 정치적 힘을 배경으로 자기 세력을 강화시키는 데 부심했다. 때문에 친연성이 보다 깊은 나라에서 주민 이주나 발달된 문화, 기술 등을 도입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졌다. 일본열도는 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중국지역과 교섭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당시의 조선술이나 항해술로는 적극적인 교류가 힘들었다. 결국 일본 열도의 선사-고대사는 한반도의 존재 없이는 비약적인 발전이 어려웠고, 따라서 종속 또는 협력의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경쟁과 독립의 관계이다. 일본 열도에 진출한 이후 어느 정도 입지를 확보한 강력한 세력들은 대내외적으로 정치적 사건을 일으키며, 무력충돌을 낳기도 했다. 야마토 조정은 결코 어느 특정 집단의 일방적인 성격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가야, 백제, 신라, 더욱이 후기로 가면 고구려의 영향까지 보이는 것은 이런 복합적 성격을 보여준다. 이미 정치적으로 성장해 일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집단은 주체적으로 존립하길 원했으며, 때로는 자국을 지원해 연합전선을 펴거나, 때로는 독자적인 군사행동까지 시도했다. 따라서 왜병의 한반도 출병과 신라, 고구려 세력과의 충돌은 모국과 자국세력 간의 이런 인식이나 역학관계를 전제로 해석돼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당시 왜의 대한반도 관계는 한 집단과 상대집단과의 단순한 대외관계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동아지중해의 특수한 역학관계와 양 지역 간에 진행된 역사적 교류의 형태, 그 당사자들의 뿌리 깊은 인식을 기초로 이해되고 분석되어야 한다.

 

야먀토 정권의 정치국가 형성

그런데 7세기로 넘어가면서 일본 열도는 야마토를 중심으로 강력한 정치세력들이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즈음 왜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국제적 사건이 발생했다. 왜의 대외정책은 넓게는 동아지중해의 질서, 좁게는 한반도의 정치정세에 따라서 급격히 움직였다. 당시 동아질서가 재편되는 진앙지는 한반도였다. 고구려와 통일된 수나라, 당나라가 동아지중해의 종주권, 교역권을 놓고 충돌했다. 이 국제 대전은 598년에 시작되어 양상을 달리하고 전쟁 주체들이 조금씩 변하면서도 약 70여 년간 지속되었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고구려, 백제, 왜를 잇는 남북세력과 당과 신라를 연결하는 동서세력이 십자형을 이루었고, 나머지 주변국과 종족들은 보조적으로 전쟁에 동원됐다. 백제의 돌연한 멸망은 왜국에게 직접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왜는 661년부터 백제가 벌인 부흥운동에 지원병을 파견했는데, 이는 백제와의 우호관계라는 명분과 함께 당과 신라의 현실적인 위협 앞에 놓인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663년 나당 연합군에게 패배하자, 왜는 자구책을 강구하며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군사적으로 대당 및 대신라 방어체제를 해안가에 구축했다.

왜국은 새롭게 편성된 국제질서 속에서 자국의 위치를 새롭게 설정해야만 했다. 또한 군사적 실패에 따른 국내체제 정비에도 힘을 기울여야 했다. 이같은 국내외적 필요에 의해 왜국은 국호를 일본으로 개칭하기에 이른다. 덴치 9년인 670년의 일인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0년 12월 조에는 “… 倭國更號 日本, 自言 日近所出, 以爲名 …”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한 『구당서』와 『신당서』에 각각 일본국이란 명칭이 나오고 그 유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제 바야흐로 일본 열도는 한반도에 구축된 신라 위주의 신질서를 거부하는 세력들에 의해 독자적인 국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상호 밀접한 관계 속에서 복잡하게 발전해오던 양 지역 간의 특수한 역사도 이젠 신라와 일본으로 명확히 구분된, 그리고 적대적인 나라가 되어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야먀토 정권의 정치국가 형성

 

통일신라와 일본

신라는 통일 후 일본과는 668년부터 779년까지 사절을 주고받으며 공적인 관계를 이어갔다. 이때 일본으로부터 견(遣)신라사가 24회 파견되었고, 상대적으로 신라가 파견한 견일본사는 그 두 배에 해당하는 47회에 달했다. 성덕왕 2년인 703년에는 일본이 204명의 사신단을 보내기도 했다.

두 나라는 시기에 따라서 변화는 있었지만 교역은 활발했고, 특히 민간인들은 공식, 비공식적으로 바다를 건너다니면서 물건들을 사고 팔았다. 일본정부도 대마도에 ‘신라역어(新羅譯語)’를 두고 교역에 적극적이었다.

신라는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 이슬람교권 상인들과도 교역을 했다. 상인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정창원에서 발견된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에 나타난 품목들은 남중국,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산의 다양한 향료, 동남아시아와 페르시아산 약재, 그리고 신라묵(新羅墨) 종이 악기 모전(毛氈) 송자(松子) 밀즙(密汁) 구지(口脂) 경권(經卷) 불구(佛具) 경(鏡) 반저(盤箸) 등 다양한 물품들이 있었다. 당나라나 서역, 아라비아 등에서 일본으로 들어오는 물품들은 주로 신라를 거쳐야 했다.

일본인들은 당과 교류할 때 신라를 거쳐 연근해 항로를 따라 항해하다가 중국 해안으로 들어가는 북로를 가장 빈번히 사용했고, 동해를 건너 발해를 거쳐 육로로 들어가는 방법도 사용했다. 신라선을 많이 이용했으며, 심지어는 사신들도 ‘재당(在唐) 신라인’들의 배로 귀국하곤 했다.

9세기에 이르러 신라와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본은 장보고 등 신라 민간인들의 도움으로만 외부세계와 연결될 수 있었다. 장보고는 828년 귀국해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라는 독특한 직책으로 해양과 관련한 전권을 부여받았다. 그는 ‘대당매물사(大唐賣物使)’라는 물건 구입자들을 ‘교관선’이라고 부르는 무역선에 실어 당에 파견했다. 또한 선단을 거느리고 일본을 직접 방문했으며, 현재 규슈의 후쿠오카시에 지점을 설치하고 ‘회역사(廻易使)’라는 무역선을 보내 직접 교역했다. 일본 정부는 홍려관에서 민간인에게 이러한 상품들을 매매하도록 허용했다. 장보고가 죽은 이후 일본 열도에는 신라 해적들의 침입이 자주 있었고, 이들은 정부의 공물선을 약탈하기도 했다.

 

발해와 일본

발해는 698년에 건국돼 926년에 멸망할 때까지 228년간 존속했던 나라이다. 일본과의 관계가 매우 돈독해 727년 첫 사신을 파견한 이후 멸망할 때까지 공식사절만 서른네 번을 파견했다. 746년에는 발해의 철리부지역 사람 1100명이 동시에 일본 열도를 방문한 적도 있었다. 일본과 신라의 비우호적 관계 때문에, 발해는 일본에 있어 국제사회로 열린 창구가 되었다. 양국 사이의 무역은 거의 발해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양국 간의 교섭은 신라와 당이라는 두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발해와 일본은 나당 동맹으로 인해 붕괴된 고구려, 백제, 왜의 질서가 새로운 형태로 탄생된 것이었다. 8세기경 신라와 발해는 전쟁을 모색했고, 일본도 신라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따라서 두 나라는 일종의 군사동맹을 맺어 공동의 적이었던 신라를 남북에서 압박했다. 8세기 중반에는 일촉즉발의 긴장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처럼 발해와 일본은 대신라관계 및 지정학적 성격으로 인해 해양외교를 통한 협조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건국 후 29년째가 되던 해인 727년 가을, 발해의 무왕은 일본에 사절을 보냈다. 사신 고인의(高仁義)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려 죽고, 수령인 고제덕(高齊德) 등 일부만이 일본에 도착했다. 그때 국서에서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고 선언했다(『속일본기』). 일본에서도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渤海郡者 舊高麗國也)’라고 했다. 신흥 일본국의 수도인 나라(奈良)의 평성경에서 발견된 목간에도 발해에 파견한 사신을 고려사(高麗使)라고 칭했다.

이외에 양국 민간인들의 접촉과 교역도 상당했다. 발해는 담비가죽, 호랑이가죽, 말곰가죽, 꿀, 인삼, 명주나 철, 동 같은 광물, 곤포 같은 수산물 등 주로 토산품을 수출했다. 해표피, 해상어 등으로 만든 각종 수공업제품도 수출품목에 들어 있었다. 무역 규모가 커서 871년 양성규가 사신으로 왔을 때에는, 일본왕정에서 물건값으로 지불한 금액만도 40만 냥에 달했다. 무역역조 현상이 심각해지자 일본 조정은 발해사절단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고, 일본인들이 그들과 사무역하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9세기 초 이후에는 마침내 발해인들의 사행(使行)을 규제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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