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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한민족사 학술지

'역사에 대한 인식은 미래를 반영하는 거울' 한일 고대사를 제대로 알고 이를 학생들과 이웃, 후세들에게 정확히 전달해 올바른 역사관을 형성하고 세계 속에 당당한 한민족으로 우뚝 설 수 있길 기대합니다.

 


<고대 일본 복식문화의 이해> 고대 일본 복식문화의 이해 - 박선희
이름 :
박선희
소개:
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단국대 사학과를 나와 국립대만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국립대만 사범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단국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상명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인문사회과학대학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고대복식─그 원형과 정체』『한국고대사의 제조명』『남북학자들이 함께 쓴 단군과 고조선연구』『북한지역의 우리문화원형 기초연구』 등이 있고, 대한민국 학술원 기초학문분야 우수학술도서상을 수상했다.
E-mail :
shpark@smu.ac.kr

 

일본 고대복식의 역사적 배경

우리 민족의 일본 열도 진출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시작됐다. 기원전 3세기 경부터 서기 3세기경까지 약 600여 년 동안 존속했던 일본 야요이문화(彌生文化)는 한국의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가 들어가서 형성된 것이었다. 우리 복식문화와 벼농사 문화도 이즈음 함께 들어갔다.

이같은 사실은 일본 열도에서 출토되는 야요이문화 초기의 청동기와 철기가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것들은 일본 열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수입해 간 것이었다. 이런 유물들을 일본인들은 박재동기(舶載銅器), 박재철기(舶載鐵器)라 부른다. 야요이문화의 중요한 요소인 고인돌과 고인돌 유적에서 출토되는 석기와 질그릇들도 한국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것들이었다. 한반도에서 벼농사와 함께 양잠 기술과 마섬유 생산기술 등이 옮겨져 직물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도 야요이문화 시기였다.

한국사에서 기원전 300년부터 서기 300년까지는 고조선 말기부터 고조선이 붕괴되어 형성된 여러 나라 시대로서 정치적 혼란기였다. 이 시기에 정치적 혼란을 피하고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반도로부터 일본 열도에 진출했으며 이때 복식문화도 함께 들어갔다. 초기 진출지역은 일본 열도의 남부지역인 규슈(九州)였으며 후기로 오면서 점차 북쪽으로 확대됐다. 야요이 문화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과 동일한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 일본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지기도 했다.

일본 열도에는 당시까지 국가가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서기전 2333년에 이미 고조선이 건국되었으므로 한반도로부터 일본 열도에 진출한 사람들은 국가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한반도에서의 정치적 체험을 바탕으로 각 지역에 집단을 이루고 작은 나라를 세웠다. 이렇게 해서 일본 열도 여기저기에 소국들이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모국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자신들의 나라를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가야)라 하였고 복식의 고유한 특징들도 그대로 이어갔다.

그 뒤 서기 4세기 무렵 또다시 한반도의 새로운 이주민들이 들어가 고분문화를 이루게 되는데 이전에 존재했던 소국들과 새로 이주해온 집단들이 정치적으로 서로 통합하는 과정을 거쳐 서기 7세기 무렵에 비로소 국가가 출현하게 된다. 따라서 일본 열도에 정치세력이 등장하고 국가가 출현하게 된 것은 한민족이 이주한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다. 초기 고분에서 출토되는 복식품들의 양식이 이같은 사실을 확인해 준다.

 

복식재료의 영향

가죽과 모직물 : 고대 한민족이 생산했던 가죽은 특수가죽과 일반가죽으로 분류된다. 문헌자료에 나타난 특수가죽의 생산품목은 붉은 표범, 누런 말곰, 흰 사슴, 흰 노루, 자줏빛 여우, 꼬리가 긴 토끼, 흰 매, 표범류에 속하는 문피(文皮), 꼬리가 5척이나 되는 세미계(細尾鷄), 호랑이류에 속하는 흰색이 나는 비(?), 흰 말 등이 생산되었다. 이들 특수가죽은 고조선 시기부터 중국 등과 거래된 무역상품이었다. 특수가죽 외에 멧돼지, 사슴, 여우, 너구리, 담비, 호랑이, 곰, 노루, 족제비, 수달, 사향노루, 복작노루, 산양, 낙타, 오소리, 물소, 청설모 등 다양한 동물의 가죽이 모두 가죽제품의 재료로 사용됐다. 이는 고조선의 가죽 가공방법이 매우 발달했기 때문이며 이같은 기술은 한민족의 일본 열도 진출과 함께 일본으로 전해진다.

모직의 경우, 서기전 7세기경인 중국의 춘추시대에 고조선이 중국에 팔았다는 기록이 있어 고조선의 모직물 품질이 매우 우수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 중기의 유적인 길림성 성성초 유적(서기전 1000년기 초)에서 그런 사실이 확인되는데, 그곳에서는 양털실과 개털실을 섞어 짠 모직물이 출토됐다. 이 모직물은 오늘날 생산되는 다소 거친 모직물에 가깝다. 이처럼 훌륭한 기술은 후대로 이어져 신라에서는 푸른 새털로 짠 고급 모직물인 계를 생산했고, 이외에 구유, 탑등 등의 동물 털로 실을 만들어 짠 덮개나 깔개를 생산했다. 그 좋은 예가 일본 정창원에 보관된, 신라 고유의 문양이 돋보이는 깔개(그림 1)이다.

마직물 : 한반도와 만주에 위치한 고조선의 모든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여러 종류의 섬세한 마직물을 생산했다. 고구려와 부여 등에서는 무늬 있는 고운 모시를 생산했고 신라에서는 한 필의 베가 밥그릇에 들어갈 정도로 고운 40승포와 금실을 섞어 짠 금총포(金總布)도 생산했다. 이런 고급 마직물들은 일본에 예물로 보내지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야요이문화 시대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들로부터 마섬유 생산기술을 전수받았다. 일본은 직물 생산뿐 아니라 옷 만드는 기술도 늦었다. 벼농사와 양잠이 시작된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3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아직 옷 만드는 기술이 없어, 옷을 잡아매 바지 모양으로 입기도 했다.

서기 4세기에 와서야 일본은 백제에 재봉 기술을 가진 공녀(工女)를 요청해 옷을 만드는 시조로 삼았다. 이후 주변국들과 교류가 매우 활발해지면서, 고분의 축조가 왕성했던 5세기 이후의 고분에서야 비로소 다양한 복식 형태가 출현하기 시작한다. 그 예로 당 태종 시기(서기 627~649년)의 염립본(閻立本)이 그린 왕회도(王會圖)에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사신의 복식(그림 2, 2-1, 2-2)과 일본 사신의 복식(그림 3)이 큰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실크섬유 : 일반적으로 한국과 중국 및 일본 모두 고대 한국의 양잠기술은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믿어왔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고대 한국은 중국과 같은 시기인 신석기시대부터 양잠과 방직을 시작해 실크를 독자적으로 생산했고, 이 기술은 그대로 이어져 우리나라만의 고유 직물을 만들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 열도에서는 야요이문화 시기에 처음으로 양잠을 시작했다. 야요이문화의 뒤를 이어 서기 4세기경에 고훈(古墳)문화가 출현하는데, 이 시기에 왜는 견(絹)을 생산해 가야의 왕에게 보내기도 했다. 고훈문화는 한반도의 가야지역에서 건너간 것이었다. 일본의 사서에는 당시에 가는 누에실을 겹쳐 짠 겸(?)이나 물감 들인 오색실을 섞어 짠 금(錦) 등 한민족이 생산했던 고급 실크 섬유를 생산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가공하지 않은 누에실로 짠 견(絹)만을 생산했을 뿐이다.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에서도 겹누에실로 두텁게 짠 백(帛)과 오색견, 무늬를 넣어 두텁게 짠 기(綺), 그물처럼 성글게 짠 나(羅) 등을 일본에 예물로 보냈다.

면직물 : 고대 한국에서는 매우 일찍부터 야생의 초면을 가지고 면직물을 생산했다. 고려 말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꽃이 크고 생산량이 많은 인도 면종인 목화를 들여오면서 초면은 급격히 사라졌다. 따라서 우리나라 면방직이 문익점과 정천익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본 것은 바로 인도면이 처음 길러졌다는 의미일 뿐이다. 이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목화가 재배됐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고구려에서는 백첩포(白疊布)라 불리는 면섬유를 생산했고 신라에서는 백첩포와 면주포(?紬布)를 생산했다. 초면인 백첩은 한국과 신강 등 한랭한 대륙성 기후에서 자란다. 풀로 알려진 백첩은 꽃이 작아 생산량이 적지만 희고 부드러우면서도 빛이 나, 이것으로 짠 백첩포는 최고로 여겼다. 문익점이 들여온 인도면은 나무처럼 크고 꽃이 커 생산량이 많았다. 따라서 백첩포는 인도면과 달리 면섬유 가운데 최고급품으로,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 예물로 보냈다. 면주포는 면과 실크의 합사섬유이다.

 

가야계 복식의 영향

일본에서 고분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3세기 말경부터 4세기 무렵의 초기고분에서 출토되는 복식들의 양식은 거의 한반도의 것과 동일하다. 고분에서 출토되는 거울, 무구, 마구 외에 복식품으로 관모와 신발, 허리띠장식, 갑옷, 귀고리, 목걸이, 팔찌 등이 모두 그러하다.

복식품 가운데 비교적 다양하게 출토된 갑옷에 대해 살펴보자. 한반도의 갑옷 생산 기술은 일본의 초기 갑옷 생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서 서기 4세기와 5세기경에 만들어진 철갑옷과 철투구들은 신라와 가야의 갑옷과 같은 모습들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학자들은 일본 갑옷이 일본에 건너온 대륙의 공인과 한반도 남부에서 귀화해온 기술자들의 기술교류에 의해 제작됐다고 주장한다. 또 일본의 공인과 한반도, 중국에서 도래한 공인들을 통합한 공인조직에 의해 모두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연산동과 상백리에서 출토된 갑옷과 투구를 일본의 것으로 단정하고,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방증 자료로 삼는 연구자들도 있다.

중국학자들은 서기 4~5세기 일본의 갑옷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한반도의 기술을 이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구려 갑옷의 다양한 특징들은 북방지역의 것, 또는 북방지역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갑옷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부여 갑옷과 마찬가지로 고조선 갑옷의 특징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고조선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가죽갑옷, 뼈갑옷, 청동갑옷, 철갑옷을 생산했다. 또한 고구려의 말갑옷과 등자의 생산시기가 중국이나 북방지역보다 약 2세기 정도 앞선다는 사실은, 일본 고분에서 출토된 갑옷과 투구가 신라나 가야의 수입품이거나 한반도로부터 영향을 받아 제작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본 고분에서는 고조선 유적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청동제 갑편은 출토되지 않는다. 1872년 오사카(大阪)에 위치한 인덕릉(仁德陵)이라 전하는 다이센고분(大山古墳)에서 ‘금과 같은 청동’으로 만든 단갑(短甲)이 발굴됐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다시 매장됐고, 모습만을 그려 남겼다.

일본 열도에는 야요이문화의 뒤를 이어 서기 4세기 무렵 고훈문화가 출현하는데, 이 문화는 한반도의 가야지역에서 건너간 것이다. 서기 4세기부터 철정(鐵鋌)이 가야지역에서 일본 열도로 전달되어 이것을 이용한 본격적인 철기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서기 5세기 전반에 철제 마구류 등이 만들어졌고 서기 5세기 후반에 철제의 갑옷과 투구가 제조되었는데, 이 같은 제조기술들은 한반도의 가야에서 건너간 것이었다.

인덕릉에서 발견된 단갑의 재질이 ‘금과 같은 청동’이라 했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한 신라 사람들이 즐겨 사용한 유석(鍮石), 즉 황동(黃銅)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되며 신라나 가야로부터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나라현(奈良縣) 오조시(五條市) 묘총(猫塚) 고분 출토 철투구(그림 4), 지바현(千葉縣) 기사라주시(木更津市) 출토 철투구(그림 5), 시가현(滋賀縣) 신카이(新開)고분, 오사카부(大阪府)의 칠관(七觀)고분에서 출토된 단갑과 사이타마현(埼玉縣) 고라마초이쿠노산(兒玉町生野山)고분들에서 출토된 단갑(그림 6) 등은 가야의 유적인 동래 복천동 10호와 11호 고분의 유물과 거의 일치하며, 나라(奈良)지방의 초기 고총고분(高塚古墳)은 입지조건, 내부구조, 장법 등에서 한반도의 가야 고분과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 같은 사실들은 이 유적과 유물의 주인공들이 한반도의 가야계였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일본에서 출토되는 갑옷과 투구들은 한반도로부터 수입한 것이거나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이주한 가야인들이 한민족의 발전된 문화를 그곳에 전달했던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일본의 고대 복식문화의 기초는 한민족 복식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여러 모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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