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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한민족사 학술지

'역사에 대한 인식은 미래를 반영하는 거울' 한일 고대사를 제대로 알고 이를 학생들과 이웃, 후세들에게 정확히 전달해 올바른 역사관을 형성하고 세계 속에 당당한 한민족으로 우뚝 설 수 있길 기대합니다.

 


<고대 한일 관계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고대 한일 관계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김현구
이름 :
김현구
소개: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 취득. 미국 UCLA 객원교수, 와세다대학 객원교수, 나고야대학 객원교수, 와세다대학 교환교수, 일본역사연구회회장,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 고려대학사범대학학장, 고려대학교일본학센터소장을 거쳐 현재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야마토정권의 대외관계연구』 『임나일본부연구』 『김현구교수의 일본이야기』『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등이 있다.
E-mail :
65kimhk@hanmail.net

 

남선경영론의 상반된 해석

오늘날 세계는 ASEAN, NAFTA, EU 등에서 엿볼 수 있듯 지역 간 협력과 통합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동아시아 세계, 특히 한일관계도 시차는 있을지 몰라도 협력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좋은 예가 상호무역 관계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일본에게 수출과 수입 면에서 모두 3위의 나라이며, 일본은 한국에게 3위의 수출국이자 제 1위의 수입국이다.

그러나 현재 한일 간에는 일본 역사교과서에 반영되어 있는 ‘남선(南鮮)경영론’ 문제로 반일(反日), 혐한(嫌韓)론이 고조되고 있다.

'역사에 대한 인식은 미래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일 간에 논쟁이 되고 있는 이 남선경영론은 같은 사실에 대한 상반된 해석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면 일본열도에 남아 있는 한반도계의 유물이나 유적에 대해 일본학계에서는 고대 야마토(大和) 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 한국학계에서는 후진지역에 대한 문화적 시혜 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남선경영론’에 대한 올바른 인식 없이 한일 간의 진정한 협력은 어렵게 되어 있다.

19세기 말 한국 병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그 역사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바로, 야마토 정권이 조선 남부를 지배했다는 ‘남선경영론’이다. 오늘날 개념으로 본다면 ‘한반도남부 경영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이를 ‘야마토 정권이 4세기 중반에서 6세기 후반까지 약 200여 년 동안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그 지배기구로서 임나일본부라는 기구를 두었다’고 체계화시킨 것이 바로 스에마쓰(末松保和)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1949. 출판은 전후에 되었지만 전전에 발표된 내용들을 모은 것)이다. 그런데 스에마쓰설의 귀착점이 ‘임나일본부’이기 때문에 이때부터 ‘한반도남부 경영론’이 ‘임나일본부설’이라고도 불리게 된다.

전후 학문의 자유가 허용되고 한국 침략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면서 한반도남부 경영론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스에마쓰설의 귀착점이 ‘임나일본부’였기 때문에 스에마쓰설에 대한 비판은 주로 임나일본부라는 기구에 집중됐다. 그 결과 한반도남부 지배기구로서의 임나일본부의 존재는 부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임나일본부라는 기구의 부정이 곧 한반도 남부에서 활약한 왜(倭)의 주체적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학계는 한반도남부 지배기구로서의 임나일본부의 부정을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 남부 지배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받아들여 임나에서 활약한 왜의 자리에 가야연맹을 채워 넣었다. 이런 가운데 일본 역사교과서에 ‘야마토 조정은 바다를 건너 조선에 출병해 임나라는 곳에 거점을 만들었다’라는 표현이 등장, 소위 ‘역사교과서 문제’를 야기시킨 것이다.

사실 『일본서기』는 차치하고 한국의 『삼국사기』나 「광개토왕릉비문」, 중국의 『송서』 왜인전 등을 보아도 왜가 한반도 남부에서 활약한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아직까지도 일본학계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한반도 남부에서 활약한 왜의 활동을 야마토 정권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남부 지배기구로서의 임나일본부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남부 경영론이 불식되지 않고 한일 간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열도에 최초로 통일정권인 야마토 정권이 등장함으로써 한반도 각국이 그들과 정치적 의미에서 교류를 시작한 것은 대략 4세기 후반이다. 고구려가 백제와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던 낙랑(313년), 대방(314년)을 차례로 멸망시킨 다음부터 양국 사이에는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이에 백제는 야마토 정권에 구원을 요청하면서 선진문물의 지속적인 제공을 조건으로 397년 왕자 전지(腆支)를 야마토 정권에 파견한다. 그 결과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것처럼 왜는 백제에 대한 군사지원을 시작한다.

405년, 8년 만에 귀국해 즉위한 전지(腆支)가 일본왕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누이동생 신제도원(新齊都媛)을 파견한 것을 필두로 적계여랑(適稽女郞), 지진원(池津媛)등 왕녀들이 연이어 파견됨으로써 양 왕실 사이에는 혼인관계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왕녀들을 둘러싸고 지배층에 분쟁이 일어나자 백제에서는 왕녀 대신 461년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昆支)를 필두로 의다랑(意多郞), 마나군(麻那君), 사아군(斯我君)등 남자 왕족들을 파견하기 시작한다. 이런 왕실간의 교류 결과 6세기가 되면 백제에서는 동성왕(479~500)과 무령왕(501~522) 등 일본에서 성장한 곤지의 아들들이 귀국해 즉위하고, 일본에서는 그들의 동생이거나 최소한 그들과 함께 성장한 계체천황(繼體天皇 : 507~531)이 즉위함으로써 양국관계는 급속히 가까워진다.

6세기가 되면 야마토 정권은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대륙으로부터의 선진문물 도입이 더욱 절실해진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삼국 간에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서로 야마토 정권을 끌어들이거나, 적어도 다른 나라에 대한 지원을 저지하기 위해 앞 다퉈 야마토 정권에 접근한다.

 

야마토 정권과 백제

야마토 정권은 세 나라 중 백제를 파트너로 선택한다. 당시 지정학적으로 한반도 3국 가운데 백제가 동양문화의 중심인 남조(南朝)와 빈번히 교류하면서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5세기 양 왕실 간의 돈독한 교류가 그 바탕이 된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백제는 불교나 유교의 경전, 한자, 의학, 약학 등의 선진문물이나 건축기술자, 와박사(瓦博士) 등의 기술자, 그리고 이마키노 데히토(今來才伎)라고 불리던, 철, 그릇, 비단, 가죽, 안장 등을 만드는 기술자들을 제공한다. 이에 대해 야마토 정권은 백제가 고구려, 신라, 가야 등과 분쟁이 있을 때마다 500명에서 1000명에 이르는 원군을 제공함으로써 양국 간에는 특수한 용병관계가 성립한다. 이런 양국관계를 중재하는 과정에서 야마토 정권의 실력자로 등장해 100여 년간 실질적으로 야마토 정권을 지배하게 된 것이 백제에서 건너간 소가(蘇我)씨이다.

6세기 후반 신라가 한반도의 대(對)중국 통로인 한강 하류를 점령하고 북조(北朝)가 중국을 통일하자 백제보다는 오히려 신라나 고구려가 중국과 활발히 교류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한반도와의 관계에서 선진문물의 도입을 주요 과제로 하고 있던 야마토 정권은 신라나 고구려와도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야마토 정권은 백제 일변도의 용병관계를 청산하고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나 고구려, 그리고 당 등 대륙의 모든 나라와 관계를 맺는 다면(多面)외교로 전환하게 된다.

한편 야마토 정권의 백제 일변도 정책에도 불구하고 신라나 고구려는 야마토 정권의 백제에 대한 지원을 저지하기 위해 야마토 정권이 필요로 하던 선진문물을 제공하면서 접근하고 있었다. 그 결과 백제계의 소가(蘇我)씨 씨사(氏寺)인 아스카지(飛鳥寺)나 호류지(法隆寺), 백제궁, 9층탑 등으로 대표되는 백제문화에 못지않은, 신라계 진(秦)씨의 씨사인 고류지(廣隆寺)나 일본 국보 1호 미륵반가사유상으로 대표되는 신라계 문화, 그리고 담징의 벽화나 평양에서 관측된 다카마쓰(高松)고분과 기토라 고분 벽화의 별자리로 대표되는 고구려계 문화가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3국에서 전래된 이런 문물은 아스카(飛鳥)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아스카 문화의 꽃

7세기 중반부터 당의 고구려 원정이 시작되고 한반도에서는 3국 간에 통일을 위한 전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혜일(惠日), 고향현리(高向玄理), 승민(僧旻) 등 당·신라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미 야마토 정권에 선진문물을 제공할 수 없게 된 백제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당·신라와의 관계를 강화할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이에 야마토 정권으로서는 백제나 신라·당 중에서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백제와의 관계를 배경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가(蘇我)씨로서는 백제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은 권력 기반을 상실하는 것이므로 결국 신라·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오히려 친(親)백제 정책으로 회귀한다. 여기서 신라계인 중신겸족(中臣鎌足)과 당·신라에서 유학한 고향현리, 승민 등이 중심이 되어 645년 6월 소가씨를 타도하고 다이카(大化)개신을 단행한다.

개신정권이 이듬해 고향현리(高向玄理)를 신라에 파견해 일본에 친(親)신라 정권이 들어섰음을 알리자, 김춘추는 즉시 도일해 개신 정권이 필요로 하는 선진문물을 제공할 것을 약속한다. 그는 야마토 정권의 지원과 함께 당과의 화해를 약속받고 귀국한다. 648년 당에 들어간 김춘추는 개신 정권과 신라의 협력관계를 설명하고, 일·당 관계를 중재함으로써 신라·일본·당의 3국 연합체제가 성립한다. 여기서 신라의 학제나 관제 등이 개신 정권에 도입된다.

그러나 개신 정권에서 효덕(孝德)천황(646~654)과 황태자 중대형(中大兄·뒤의 天智천황·662~671)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지면서 중대형 황태자는 친신라 정책을 취하는 효덕(孝德)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계의 소가(蘇我)씨와 손잡고, 신라가 당과 손을 잡으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는 경우 당이 일본열도까지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논리로 신라·일본·당의 3국 연합체제를 청산하고 백제·고구려와 손잡을 것을 주장하게 된다.

그들은 649년 효덕체제를 무력화시키고 당에 대항해 아스카에 대한 방위체제를 강화한다. 663년 백제부흥군이 구원을 요청하자 400여 척의 배에 약 3만의 구원군을 보내 백제부흥군·고구려와 함께 백촌강에서 당·신라 연합군과 싸우게 된다. 백촌강 싸움의 패배로 일본열도에서는 천지 정권이 무너지고 본격적인 율령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대륙에서는 당이 백제에 이어 고구려까지 멸망시킴으로써 한반도에는 통일신라가 등장하고 중국에는 당 제국이 성립한다. 여기서 오늘날 동아시아 세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한국, 일본의 통일국가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고대 한일관계는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 남부 경영이나 한반도 3국의 문화적 시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상호간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와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선진문물을 추구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백제와의 용병관계, 때로는 신라·백제·고구려 등 한반도 3국 모두와 관계를 맺는 다면외교로, 또는 신라·당과 연합하는 3국 연합체제를 형성하는가 하면, 백제·고구려와 손잡고 신라·당과 국운을 건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반면 한반도는 3국으로 분열돼 있었기 때문에 서로 야마토 정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다른 나라에 대한 지원을 저지하기 위해 야마토 정권이 필요로 하는 선진문물을 제공하면서 접근했다. 그 결과 3국의 다양한 문화가 일본열도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에게는 당시 3국과 일본의 관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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